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살벌할 정도로 직설적인 단편소설 ‘더 킬러즈’(The Killers)는 이미 죽은 자의 체념으로 묵묵히 죽음을 환영하는 사나이에 관한 운명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은 도대체 이 사나이가 왜 자기를 죽이러 온 살인자들을 묵묵히 맞았는지를 물어보는 부도덕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글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이 독일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옮겨 온 로버트 시오드마크 감독의 동명영화(1946·사진)다. 살인과 강도와 남자를 유혹해 죽음으로 유인하는 요부가 나오는 이 영화는 필름 느와르 장르를 정립해 준 작품으로 잔뜩 잡아당긴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고 거칠면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지닌 매력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당시 무명씨였던 곡마단 곡예사 출신의 버트 랭카스터(32)의 데뷔작으로 그는 여기서 실존주의적 동물 같은 힘을 과시, 대뜸 스타가 되었다. 랭카스터는 이 암담한 분위기의 영화에서 내면에 잠복한 힘을 지닌 어두운 남성미를 보여주는데 신선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는 헤밍웨이 팬으로 헤밍웨이의 소설은 모두 다 읽어 더욱 영화 주인공 스위드의 내면 연기를 광채 나게 발산할 수 있었다.
두 킬러가 다이너에서 스위드의 숙소를 묻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첫 장면부터 영화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벤-허‘의 음악을 작곡한 역시 유럽 출신의 미클로스 로사의 음악이 시종일관 운명을 재촉하는데 싸구려 호텔 방에 드러누워 있던 스위드는 체념한 상태로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킬러들의 총알을 빗발처럼 맞으며 숨진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스위드의 목숨 값을 지불해야 하는 보험회사 수사관(에드몬드 오브라이언)이 스위드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과거로 돌아간다. 권투선수였던 스위드는 범죄세계 속에 발을 디디면서 현금 수송차 강탈에 참여한다. 그를 사건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치명적 여인(femme fatale)이 범죄단 두목의 요염한 정부 키티(에이바 가드너).
스위드는 새카만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담배연기를 자욱히 내뿜으며 피아노 반주에 맞춰 허스키한 음성으로 ‘사랑을 알게 될수록’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키티를 보고 첫 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키티는 스위드에게 현금 수송차를 털어 현금을 챙긴 뒤 둘이 먼 곳으로 튀자고 제의, 봉 같은 사나이는 여인의 간계에 넘어간다. 그러나 돈과 보석에 눈이 먼 키티는 스위드를 배신하는데 결국 영화 속 악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
이 영화는 그때까지 섹스 심벌로만 알려졌던 가드너가 처음 극적 역을 맡아 연기력을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매우 육감적인 영화인데 각본은 헤밍웨이도 조금 손을 댔으나 대부분 이 영화와 스타일이 비슷한 ‘아스팔트 정글’을 감독한 존 휴스턴이 썼다.
‘더 킬러즈’는 1964년 단 시겔 감독에 의해 새디스틱한 총천연색 영화로 다시 만들어졌다(시겔은 원래 1946년도 판의 감독으로 선정됐었으나 계약문제로 불발됐다). 두 영화는 20년간의 사회 변화를 뚜렷이 반영하듯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모든 면에서 흑백판이 낫지만 신판도 매우 속도감 있고 날카롭고 흥미진진하다.
당초 이 영화는 NBC-TV에 의해 네트웍 사상 최초의 TV 영화로 제작됐으나 영화가 매우 폭력적인 데다가 케네디 암살 후여서 극장용으로 나왔다. 나는 이 영화를 중앙극장서 봤는데 호화 캐스팅과 긴장감 있고 빠른 진행 그리고 음모와 배신과 죽음의 얘기가 화려한 신파극 못지 않아 재미를 만끽했던 기억이 난다.
신판은 로널드 레이건의 할리웃과의 고별작품으로 레이건이 냉정한 범죄단 두목이라는 최초의 악역을 맡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레이건은 그 뒤로 내내 악역을 맡은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고 하는데 영화 개봉 2년 후 캘리포니아주 지사로 당선됐다.
레이건은 자동차 경주 선수였던 자니(존 캐사비티스)를 유혹해 범죄에 끌어들이는 요부 앤지 디킨슨의 남편으로 나오는데 디킨슨은 혼자 살아 남으려다 레이건에게 뺨을 여러 차례 얻어맞는다. 그러나 레이건 역시 자기가 고용한 킬러 리 마빈에 의해 뺨을 얻어 맞은 뒤 총알을 맞고 황천으로 간다. 이 영화는 자니를 쏴 죽인 두 킬러가 자니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특히 마빈의 냉소적인 모습이 멋있었다.
크라이티리언(Criterion)사에서는 이 두 영화를 한데 묶은 DVD(40달러)를 최근 출반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학생 시절 같은 내용을 19분짜리 단편으로 만든 영화가 포함 됐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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