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놓고 찬반론이 요란한 가운데 할리웃을 비롯한 미연예계에 블랙 리스트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 반전 발언 때문에 거센 보이콧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 인기 여성 3인조 컨트리 그룹 딕시 칙스. 이 그룹의 리드 싱어로 텍사스 출신인 나탈리 메인스(사진 가운데)가 지난 달 런던 공연서 “우리는 미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발언을 하면서 컨트리 송을 즐기는 미남부가 발칵 뒤집혔다.
메인스는 그 뒤 부시에게 사과를 했지만 화가 난 40여개의 컨트리 라디오 방송국들이 딕시 칙스의 노래를 보이콧했고 톨레도와 슈레브포트 같은 곳에서는 그들의 CD를 밟아 깨버리는 모임까지 열렸다. 또 이번 전쟁에 파견된 해병들의 부대가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의회는 딕시 칙스에게 사과와 함께 군 가족을 위한 무료 공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할리웃에서는 지금 격렬한 반전론자들인 배우들이 앞으로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낭설이 돌고 있다. 션 펜은 이 때문에 지난달 제작자 스티브 빙(배우 엘리자베스 헐리가 낳은 아기의 친자확인 소송을 당했던 사람)을 상대로 소까지 제기했다. 펜은 1.000만달러를 받고 빙이 만들 영화 ‘왜 남자는 결혼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나오기로 했으나 자신이 지난 12월 바그다드를 방문하고 반이라크전 의사를 표명하면서 빙이 약속을 깼다고 주장했다.
TV시리즈 ‘웨스트 윙’에서 미 대통령역을 맡고 있는 데모꾼 마틴 쉰은 얼마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반전주의 때문에 시리즈를 방영하는 NBC-TV의 고급 간부들이 자기를 기피한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서 기록 영화상을 받은 뒤 수상소감에서 부시를 맹공격한 마이클 모어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도 블랙 리스트 문제가 거론됐다. 기자들이 모어에게 할리웃의 블랙 리스트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언제 할리웃과 손잡고 일 했느냐. 이번 영화 제작비도 캐나다서 댄 것”이라며 코방귀를 뀌었다.
인식 때문에 살고 파워를 즐기는 것이 워싱턴과 할리웃의 공통점이긴 하나 워싱턴에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진보적인 할리웃은 새삼스레 옷깃을 여미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동과 서의 보수 대 이념의 대결에서 할리웃이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이 2차대전 후 냉전시대였다. 당시 일종의 마녀사냥인 공산당 때려잡기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미하원 비미국적행동조사위(HUAC)는 1947년과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할리웃의 연예인들을 집중적으로 색출하는 작업에 들어갔었다. 명분은 좌경세력 색출이었지만 조사위의 진짜 표적은 할리웃에 만연한 진보성향이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지 않으려고 동료를 배신했고 연기파인 존 가필드(‘우체부는 항상 벨을 두번 누른다’)는 블랙 리스트에 오른 후유증으로 결국 요절했다. 또 조셉 로시와 줄스 다신(‘일요일은 참으세요’) 같은 감독들은 유럽으로 도주해 활동을 했다.
당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각본가들. 조사위 청문회에 출두, 자신들의 정치신념에 관한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해 옥살이를 해야 했던 ‘할리웃 10’ 중 대부분도 각본가들이었다. 이때 미배우 노조위원장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은 미연방수사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료 ‘매국노’들을 고자질했었다.
공산당 때려잡기의 선봉장이었던 사람이 조셉 매카시다. 위시콘신 출신의 무명 상원의원(공화)이었던 이 선동가는 당시 냉전 분위기에 편승, 공산주의를 팔아먹으며 일약 미디어의 총아이자 정치계의 스타가 됐었다. 매카시즘은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였는데(박정희 시대가 생각난다) ‘우리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부시를 생각하면 미국이 매카시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배우들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행동 때문에 비판과 핍박을 받는 일은 그 뒤로 지금까지도 계속돼 오고 있다. 베트남전을 반대한 제인 폰다와 엘살바도르의 좌익반군을 지지했던 전 미배우노조위원장 에드 애스너 및 반 시온주의자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은 극우파들에 의해 격렬한 보이콧 운동의 대상이 됐었다. 심지어 로버트 레드포드와 잭 레몬 및 그레고리 펙 같은 진보주의자들은 쿠바 영화제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할리웃에 블랙 리스트 설이 다시 나돈다는 것은 시대의 보수성을 시사한다. 반전을 비애국적 행위로 보는 것이야말로 레드 넥식 사고방식이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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