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일보의 자매회사인 라디오서울(AM1650)을 통해 매주 일요일 아침(상오 10시10분~11시) ‘영화음악’을 방송한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의 서툰 방송을 이끌어주어 온 사람은 똑똑하고 상냥한 강혜신씨.
평생을 쓰는 기자로 살아온 나는 방송경력 10년이 되었지만 역시 말하는 것이 쓰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나는 방송이 끝나고 나면 그걸 지워버리고 다시 하고픈 생각을 자주하곤 한다.
방송의 매력은 청취자의 반응이 직접적이요 빠르다는 것. 같은 내용이라도 신문기사보다 방송에 대한 피드백이 빨라 영화에 관한 여러 가지 문의사항을 전화로 받거나 또는 글로 받을 때가 많다.
어느 날 LA에 사는 박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봉투에 쓴 글씨가 매우 세련돼 보였다. 안에 적은 글체도 매우 달필이었는데 펜이나 만년필로 쓴 것 같은 한자가 섞인 한글 내용이 무척 겸손한 데다가 또 영화에 대한 애착이 매우 많아 보여 그 분의 문의내용에 공개회신을 쓰기로 했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늙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씨는 일요일 10시에 ‘영화음악’은 아파서 누워 있어도 꼭 듣는다면서 몇 가지 질문을 적어왔다.
첫 번째 물음은 ‘메리 위도우’에 관한 것. 워낙 오래돼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면서 작품 연도와 감독 및 주연배우 이름을 물어왔다.
즐거운 과부라는 뜻의 ‘메리 위도우’(The Merry Widow)는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가 원전. 가상의 유럽 소왕국의 재산을 절반 정도 소유한 과부가 인생을 즐기려 파리로 떠나자 재정난을 두려워한 왕이 자기 아내와 바람을 피운 플레이보이 귀족에게 파리로 가 과부를 귀국시키라고 명령한다. 임무를 제대로 수행 못하면 군재에 회부될 판.
하도 유명한 희가극이어서 무성영화 외에도 두 차례나 더 영화화 됐는데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언스트 루비치가 감독하고 모리스 슈발리에와 재넷 맥도널드가 주연한 1934년작이다.
두 번째 물음은 고 존 휴스턴 감독의 아버지가 명배우였는데 그 이름과, 박씨가 학교를 나와 제일 먼저 본 이 사람이 나온 영화 제목이 무어냐는 것. 월터 휴스턴은 연기파로 아들이 만든 영화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1948)에 나와 아들은 오스카 감독상과 극본상을 그리고 아버지는 남우조연상을 각기 받았다.
그런데 박씨가 일본 제목으로 ‘순백한 처녀지’라고까지 적어 보낸 월터 휴스턴이 나온 영화의 미국 이름은 백방으로 조사해 봤으나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찰턴 헤스턴이 나온 ‘지상 최대의 쇼’(1952)의 주연 여우 이름. 성은 허튼인 줄 알겠는데 이름을 모르겠다고. 토실토실하고 귀엽게 생긴 베티 허튼이다.
마지막 물음은 대학교 때 본 데아나 더빈이 나온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스토코우스키인지 차이코프스키인지 구별이 안 된다고.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하는 멋쟁이 레오폴드 스토코우스키가 영화에서 헝가리 광시곡 제2번을 지휘하던 장면이 기억에 생생하다.
박씨는 80이 된 노인으로 누워서도 옛날 본 영화를 회상하면서 사는 나날이라고 글을 마쳤다. 나는 이 분의 편지를 읽고 영화가 우리 마음에 자리하는 감동이 이토록 깊고 오래 가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시큰해 들어왔다. 박 선생님이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영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바이다.
이 편지와 거의 비슷한 때에 LA에 사는 나의 친구 C에게서 e메일이 전달됐다. 그는 영화는 환상을 보는 것이요 빛과 소리를 흰 벽면에 투사시켜 형상을 보는 것은 흡사 플라토의 동굴에서 그림자를 보며 과거의 진실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영화의 환상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니 이것은 장자의 나비 꿈보다 몇 갑절 더 전환된 것이 아니냐면서 영화를 사랑하는 열정 속에 해탈의 문고리가 잡히기를 바란다고 글을 맺었다.
영화와 플라토와 장자를 맺어놓은 깊은 마음의 친구의 말처럼 나는 영화를 하나의 철학적이요 종교적 명제로 여기고 있다. 좋은 영화를 보는 마음이 숙연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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