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USA투데이를 들추다 아프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면서 지난 5년간 금지됐던 영화 상영이 허락되자 카불시내 영화관들은 쇄도하는 관객들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글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감개가 무량했다.
기사는 카불서 극장에 가는 일은 몸싸움 스포츠라고 비유하고 600석짜리 극장에 800여명이 몰려들어 서로 밀치고 붙잡고 아우성을 치는 대소동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신문은 이어 사람들은 자빠지고 넘어지면서 극장 복도와 무대 위까지 진출, 형편없는 화질의 영화를 보면서도 즐거워한다고 덧붙였다. 또 암표 값은 정식 입장료(20센트에 해당하는 5,000아프가니)의 2배인데도 잘 팔린다고.
영화비평이 직업인 나는 어린 시절 요즘의 아프간 사람들과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다. 부산 피난시절 무성영화시대 변사의 옆에 앉아 할리웃 영화를 보면서부터 영화광이 된 나는 그 때부터 영화에서 현실의 번거로움을 잊는 버릇을 갖기 시작했었다. 일종의 현실기피주의자가 된 것이다.
나의 본격적인 극장 출입은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시작돼 고교시절에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극장엘 갔었다. 우리 또래가 자주 다니던 극장은 재개봉관으로 그 때는 할리웃 영화가 터진 봇물 쏟아지듯 수입됐었다.
나는 장르를 구별 않고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는데 제일 자주 간 극장은 현 조선호텔 앞에 있던 경남극장이다. ‘노인과 바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솔로몬과 시바’ 등은 다 여기서 본 영화들.
경남극장에서 나는 어느 날 캄캄한 장내서 영어선생님 옆에 않았다가 들켜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때 본 영화가 프랭크 시나트라와 토니 커티스 및 나탈리 우드가 나온 전쟁영화 ‘킹즈 고 포스’다.
이기붕 집 앞에 있던 동양극장도 내가 자주 가던 곳. 나는 용돈 떨어지면 사전을 팔아 극장엘 갔는데 이 극장서 필사의 투쟁을 하며 ‘7인의 신부’를 보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는 추석이나 신정 또는 설이 되면 ‘특선영화’라고 내걸었는데 ‘7인의 신부’도 그런 특선영화였다.
영화 외에는 별 낙이 없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명절 때면 극장에 운집하곤 했는데 꼬마였던 나는 이런 때면 어른들에게 짓밟히다시피 하면서도 악착같이 영화를 봤다. ‘7인의 신부’가 상영되던 날 극장측은 정원(그런 것 있으나마나였다)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집어넣었는데 인파에 유리창이 깨지고 "사람 죽는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또 다른 나의 단골인 명동극장에서 무슨 명절엔가 서부영화 ‘초연’을 봤을 때는 아예 밀려든 인파에 2층서 관객이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런데도 영화는 상영됐었다. "더 쇼 머스트 고 온."
그때는 입석 관람은 보통 일로 키가 작았던 나는 어른들의 장막에 가려 영화를 보는데 꽤나 애를 먹었었다. 그러면서도 명동극장서 시종일관 깔깔대며 즐겼던 영화가 ‘뜨거운 것이 좋아’였다.
종로에 있던 우미관(알란 래드 주연의 웨스턴 ‘배드랜더즈’를 봤다)과 을지로 6가에 있던 계림극장(게리 쿠퍼 주연의 웨스턴 ‘북소리’) 그리고 종로 5가쯤에 있던 사형 당한 깡패 임화수 소유의 평화극장(게리 쿠퍼 주연의 남북전쟁 영화 ‘우정 있는 설복’) 등도 내가 자주 찾던 극장들이었다.
당시 교육시책은 단체관람 아니면 학생은 무조건 극장엘 못 가게 한 탈레반 정권의 행패와 같은 것이었다. 말리면 더 한다고 그런 시책에 주눅들 우리들이 아니었다. 나는 정학도 고사하고 물불을 안 가리고 영화를 봤었다. 초등학생 때는 돈이 없으면 수치를 무릅쓰고 극장 앞에서 혼자 들어가는 어른에게 사정해 따라 들어가기까지 했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로서는 영웅적인 행위였다.
영화는 그만큼 나의 인간 성장에 큰 영향을 준 예술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영화에 대해 고마워하고 또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비교적 진보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도 어느 정도 영화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할리웃 키드가 미국 그것도 할리웃이 있는 LA에 정착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영화임은 분명하다.
내게 있어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나 직업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총체적 정열이요 마음의 습기로서 내게 끊임없이 불과 물을 공급해 주면서 지금도 나를 달구고 시들지 않게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영화를 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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