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의 두 번째 할리웃보울 연주회는 완벽했다. 지난 29일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LA필하모닉과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Emperor’)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1년전 데뷔무대에서 성시연 지휘로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을 협연했을 때와 비교해보면 훨씬 안정감 있고 유쾌한 연주였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클래식음악계의 신성이자 총아로 떠오른 지 불과 2년, 세계무대에서 탑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한 그는 이제 표정과 제스처에서 한층 여유 있고 자유로운 느낌이 묻어난다. 겨우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잊고 음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성숙함은 더 커졌고.
흰색 턱시도를 입은 임윤찬은 한 음 한 음 정성껏 최선을 다해 건반을 쳐나갔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심장을 강타하는 음이 나올 때까지 연습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보여준 연주였다. 특히 아다지오 2악장에서 들려준 절제된 터치는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임윤찬은 올여름 할리웃보울에 오기 전 ‘황제’를 두 번 더 쳤다. 7월29일 영국 BBC 프롬스(Proms)에서와 8월2일 스위스 베르비에(Verbier) 페스티벌에서의 연주가 그것이다. 두 번 모두 평론가들의 열띤 찬사를 받았는데 특히 BBC 프롬스에서의 전석매진 연주는 “임윤찬의 활기 넘치는 섬세한 연주를 오케스트라가 따라가지 못했다”고 오케스트라를 야단쳤을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올해 초 서울시향과, 작년 2월에 도쿄필하모닉과 이 곡을 협연한 적이 있고, 2022년 광주심포니와 함께 한 ‘황제’는 실황음반으로 나왔다.
이 연주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들어볼 수 있는데 각자 녹음 상태가 많이 달라서 고르게 비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BBC심포니와의 연주가 강렬하고 매혹적이었고, 광주시향과의 협연은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교감을 이룬 ‘황제’의 교본과도 같은 연주였다.
이날 할리웃보울에서의 ‘황제’는 다른 협연들에 비해 살짝 빠른 느낌으로 청중을 안전하게 감싸 안는 연주였다. 모험과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는 아니었지만 포르테에서는 가차없이 내리치고, 여린 음에서는 한없이 섬세한, 단단하고 견고한 연주였다.
그리고 현장에서 직접 들었다는 점에서 보자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연주’였다. 게다가 무려 두다멜과 LA필 아닌가. 이날 오케스트라는 현악, 목관, 금관, 팀파니가 모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훌륭한 조연의 역할을 다하였으며 두다멜은 피아노가 빛날 수 있도록 아낌없이 배려했다.
베토벤의 5번 피아노협주곡은 자주 연주되기 때문에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사실 기교적으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곡이다. 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 3번과 같은 엄청나게 복잡한 관현악이나 난해한 피아노 테크닉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카덴자 독주 부분도 특별히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충분히 화려하고 찬란하다는 점에서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베토벤은 이 협주곡을 창작력이 가장 활발했던 중기에 썼다. 1809~10년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이 점령해 극도의 혼란 상태였고, 베토벤은 악화된 난청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이같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 그는 구김살 없이 밝고 명쾌하며 피아노협주곡의 정점을 이루는 역작을 만들어냈다. 특히 2악장의 애절하고 우아하며 서정적인 멜로디는 어떤 피아노협주곡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서 수많은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베토벤은 청각을 날로 잃어가는 와중에도 피아노협주곡 1번부터 4번까지는 모두 자신의 독주로 초연했지만 1812년 2월 빈에서 열린 5번 협주곡의 초연은 유명한 제자인 카를 체르니가 독주자로 나섰다. 이때부터 청력을 거의 상실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임윤찬은 ‘황제’를 연주하면 항상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가 떠오른다면서 “베토벤이 그토록 원했던 유토피아와 자유, 넘치는 기쁨, 그 기운을 청중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유서는 1802년 10월6일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작은 마을에서 요양하면서 동생들에게 쓴 유서로, 그의 사후에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다. 편지에서 그는 청력을 잃어가는 동안 절망하고 좌절하고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던 고뇌를 토로하면서, 하지만 예술이 그를 붙잡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리라고 다짐한다.
임윤찬은 이 유서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글답지 않게 힘 있는 글이었고, 베토벤 자신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고 풀이했다. 그의 ‘황제’ 연주에 힘과 위로와 희망이 담겨있는 이유다.
임윤찬은 올 후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지는 2024-25시즌에도 유럽각국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32회의 협연과 독주를 이어간다. 레퍼토리는 오케스트라 협연의 경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과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이고, 리사이틀에서는 드디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을 처음 선보인다. 그가 전부터 자신의 목표이자 꿈이라고 말해왔던 바흐의 불굴의 역작이다. 오는 11월3일 이스트만 음악학교 코닥홀에서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내년 4월25일 카네기홀 리사이틀까지 10회에 걸친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바리에이션’. 가슴 뛰게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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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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