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오는가. 세상일에는 아랑곳없이 바람에 온기가 묻어오고 꽃망울은 제법 부풀어 있다. 산책길을 걷고 있는데 길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가 뭔지 허전했다. 가지치기를 엊그제 했는지 군데군데 잘려나간 자리에 노르스름한 속살이 드러났다.
어른 팔뚝만 한 나뭇가지가 있던 곳에서 내 시선이 멈췄다. 제 몸의 끝부분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잘린 단면까지 올라온 수액이 갈 곳을 잃고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도 우는구나. 상처가 아물어 스스로 옹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까.
어둠 깊숙이 묻혀있던 내안의 옹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처음으로 시작한 가게가 비디오 대여점이었다. 사양길에 접어든 직종이라고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밑천이 덜 드는 직종을 택한 거였다. 남편은 그 일에 정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영화 볼 시간도 없이 살았는데 실컷 보면서 돈까지 벌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냐고 했다. 예상보다 단골손님이 늘면서 성수기인 겨울철에는 가게가 비좁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남편과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임대 재계약을 앞두고 갈등했다. 3년으로 할지 5년으로 할지. 넉넉하게 연장해 놓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아 5년 재계약을 했다. 하지만 서명할 때 손끝에 맴돌던 긴장감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은 겨울인데다 주말이라 유난히 바빴다. ‘OPEN’ 사인을 끄고 문을 닫으려는데 낯선 흑인 청년 둘이 들어왔다. 시간이 좀 지났다고 야박하게 돌려보낼 수는 없어, 남편은 알람 장치를 해제하고 나는 카운터에서 컴퓨터를 막 켜려는 순간 느닷없이 눈 앞에 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권총, 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 섬뜩한 금속성 물체가 내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진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시간도 세상도 일시에 숨을 멈춘 듯했다. 나는 권총 앞에서는 무조건 두 손을 들어야 한다는 그 기본적인 수칙마저 잊고 넋놓고 서 있었다.
그때, 그들 바로 뒤에서 알람을 해제한 남편이 권총 든 청년의 손을 힘껏 쳐올렸다. 그렇게 무모한 경우는 처음이었는지 당황하여 허둥대는 사이에 서로 발에 걸리면서 넷이 한꺼번에 엉켜 바닥에 뒹굴었다. 끝까지 총을 놓지 않고 있던 범인은 권총 손잡이로 내 이마를 내리치면서 그 틈에 문을 빠져나갔고 나머지 한 사람도 달아나버렸다. 이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총성이 울리지 않은 게 기적 같았다.
경찰과 사립 탐정이 오고 경찰은 “당신의 무모한 행동으로 당신 부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며 남편을 무섭게 나무랐다. 몇 년 지난 후에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그럴 용기를 냈는지 물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가슴에 총을 겨누고 있는 걸 본 순간 어차피 죽는구나 싶어 심장에서 총을 치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 후 나는 어두워지면 집밖에 나가지 못하고 한동안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달래야 했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 무렵 가게가 있는 동네 아파트에 케이블TV가 설치되면서 거짓말처럼 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 남편 혼자 빈 가게를 지키는 날이 이어졌다. 생각다 못해 매니저를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사무실 회전의자에 앉은 그는 나에게 앉으라는 말조차 없었다. 나는 마치 야단맞는 학생처럼 그 앞에 서서 가게 형편을 설명했다. 그는 신문에서 권총 강도 뉴스를 봤다며 건조한 목소리로 유감을 표했다.
서류를 보던 그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더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가게를 접고 싶다고 답했다. 견디기 힘든 침묵 끝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게 정리하는 두 달 동안만 임대료를 내고 문을 닫으면 되겠냐는 제안에, 나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주억거리고 서 있었다.
권총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내 안에는 작은 옹이 하나가 남았다.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면 옹이도 생기지 않는다. 원하든 원치 않든, 몸 속에 크고 작은 옹이를 새기며 나이테를 늘려가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아직도 밤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마디마디 옹이가 박혀있는 나무도 철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걸 떠올리면 위로가 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응집된 나무옹이의 눈물을 기억하며 나의 인생도 조금씩 성숙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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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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