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달과 별이 없다면 사는 게 얼마나 삭막할까. 구름 없는 밤, 뒷마당에서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에 별빛이 선명하다. 북극성이 저기 있으니 작은 곰별자리도 저기 어디쯤이겠지. 저렇게 많은 별을 마음에 들여놓았더라면 오래전부터 숱한 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겠지. 매일 달라지는 달빛은 마음을 반영하는지, 힘들고 지쳤을 땐 달빛도 파리해 보이고 우윳빛 달을 보면 나도 덩달아 넉넉해진다.
어릴 적에 나는 별자리 이름을 외우다가 기억이 안 나면 도화지에 수없이 점을 찍어놓고 마음 가는 대로 연결하여 이름을 붙이며 놀았다. 별자리 이름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달라졌지만 북극성은 늘 북극성이었다. 내가 쉽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별이었는데,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북극성은 나의 별이 되었다.
숲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늘 걷던 익숙한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보기로 했다. 시작은 좋았다. 비포장도로 숲길은 떨어진 솔잎으로 덮여 있어 폭신했고, 활짝 열린 숨구멍을 통해 자연의 숨결이 드나드는 싱그러움이 아스팔트 산책길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길을 걷다가 작은 들꽃이 눈에 띄어 가까이서 보려고 쪼그려 앉을 때면 지나가던 바람도 곁에 와서 같이 들여다보는 듯했고, 바깥세상과는 달리 숲에서는 모두가 나의 속도와 리듬에 맞춰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갈랫길이 없어 한 길로만 계속 걸었으니 그대로 되짚어가면 우리 차를 세워둔 주차장이 나오리라. 올 때와 똑같은 길로 가면 지루하다며 남편이 샛길로 접어들었다.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 뒤따라가면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 흔적이 끊긴 곳, 여기가 어딘가.
어두워지면 길을 찾기가 더 어려울 터였다. 인적 드문 숲에서 야생동물이 가끔 발견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에 겁이 났다. 날씨까지 추워져서 생각마저 닫히는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차에 두고 빈 손으로 왔으니 믿는 건 휴대전화뿐.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더라면 손전등은 물론 길안내 기능까지 있는데 무엇이 걱정일까. 여차하면 전화로 경찰에 도움을 호소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름도 없는 숲길 위치를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초승달도 겁에 질린 듯 창백했고 길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자신감 넘치던 남편도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깜깜한 숲길을 걷다가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에 별빛이 영롱했다. 아아, 저 별, 내가 찾아낼 줄 아는 유일한 별. 멀리서 북극성이 빛나고 있었다. 나와 거의 동시에 별을 발견한 남편은 북극성만 있으면 문제없다고 갑자기 큰소리치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더니 북극성에 마음을 의지하자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초승달은 실웃음을 웃는 듯했고, 못 미덥던 남편이 마치 나침반이나 된 것처럼 든든해 보였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로 지도를 검색해 보고서야, 도로가 끊긴 걸 모르고 점점 숲 속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방향 자체를 종잡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인생길도 다르지 않으리라. 이정표나 지침서가 있는 게 아니니 노래 가사처럼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모르고 걷다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인생길도 밤길도 방향감각만 잃지 않으면 에둘러 가더라도 원하는 목적지에 이를 수는 있다.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이나 삶의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니까.
며칠 후, 가로등 없는 시골길을 지나는데 주먹만 한 별빛이 사방에서 쏟아져내렸다. 어둠과 별빛뿐인 적막은 낭만으로 다가왔고, 나는 별들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인간의 가시 능력과 가청 범위 너머에 있을, 그 알듯 모를 듯한 별들의 신비스러운 암호는 내가 모르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알지는 못해도 느낌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어 삶이 풍요로울 수 있는 게 아닌지.
수많은 별 중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북극성을 바라보고 걷던 시간. 길 없는 길을 찾아 헤맬 때 내 삶이 방향을 잃지 않게 비춰주며 여기까지 함께하던 빛. 나를 문학이라는 숲으로 이끌어 준 길잡이 별빛이기도 하다. 잊으려고 글을 썼고 잊지 않으려고 글을 썼다. 그런 절실함에 기대어 그동안 펜 끝에서 풀리는 나의 언어를 감당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내 정신이 푸르던 시절은 빛이 바랬어도, 펜을 기억하지 못하는 손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나의 별빛을 잃지 않고, 행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언젠가는 나만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쓴 것이 나의 문학”이라고 릴케가 말했듯이, 별빛이 전하는 소리 너머의 소리를 언어로 받아 적으면 나의 문학이 되지 않을까. 오늘도 밤하늘엔 저마다 다르게 빛나는 별빛으로 수런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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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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