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턴은 도시 전체가 영화세트다. 이곳을 안 가본 사람들에게라도 많은 영화에 나온 도시 곳곳의 명소들로 인해 맨해턴은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도시라고 하겠다. 센트럴파크와 뮤지컬 ‘42번가’로 유명한 브로드웨이와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과 타임스 스퀘어와 워싱턴 스퀘어, 그리니치빌리지와 월스트릿 그리고 브루클린브리지와 퀸스보로브리지 및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과 크라이슬러빌딩 등은 모두 우리를 맨해터나이트로 만들어 주다 시피 한 명소와 명물들.
맨해턴의 정취와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 영화가 LA를 우습게 아는 맨해터나이트인 우디 알렌의 흑백 ‘맨해턴’(Manhattan)이다. 영화에서 신비하도록 로맨틱한 장면은 주인공인 작가 아이작(알렌)과 그의 애인 메리(다이앤 키튼)의 퀸스보로브리지 아래 데이트 장면. 새벽안개가 자욱하니 깔린 퀸스보로브리지 아래 벤치에 앉은 두 연인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쳐지는 가운데 거쉬인의 ‘섬원 투 워치 오버 미’의 멜로디가 흐르는 이 장면은 신비할 정도로 고혹적이다.
거쉬인의 노래 ‘섬원 투 워치 오버 미’(Someone to Watch over Me)는 첫 장면에서 밤의 크라이슬러빌딩을 공중회전 촬영한 리들리 스캇 감독의 로매틱 스릴러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퀸스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뉴욕형사(탐 베렌저)가 살인위협으로부터 자기가 보호하는 맨해턴의 아름다운 상류층 여인(미미 로저스)에게 빠져드는 얘기로 크라이슬러빌딩이 소시민인 형사의 잡을 수 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듯이 쓰였다. 맨해턴의 밤하늘을 마치 유린이라도 하듯이 찌르고 선 그 고고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티아라를 쓴 우아한 몸매의 여인과도 같은 크라이슬러빌딩이 최근 매물로 나왔다. 77층 1,046피트 높이의 이 아르 데코 양식의 건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뾰족탑과 괴물형상의 가고일로 유명한데 1930년에 완공되었을 때만해도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193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건설되면서 채 1년도 못 가 깨어지고 말았다. 크라이슬러빌딩은 아직도 세계 100대 최고층건물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에 맨해턴의 최고자리를 내준 뒤로 두 건물은 지금까지도 라이벌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크라이슬러빌딩의 뾰족탑은 당시 월스트릿에 짓고 있던 맨해턴은행에 최고층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신축중인 건물 안에서 남 몰래 지어 불과 90분 만에 올렸다고 한다. 건축기술상 한 쾌거로 알려져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크라이슬러빌딩을 제치고 맨해턴을 대표하는 건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반드시 높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영화 탓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의 위용을 천하에 과시한 영화가 ‘킹 콩’이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생포돼 맨해턴 쇼의 구경거리가 된 킹 콩이 탈출해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자기를 공격하는 군용기를 맨손으로 박살내는 장면으로 이 빌딩은 킹 콩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애초 ‘킹 콩’의 이 클라이맥스 장면은 크라이슬러빌딩에서 찍을 예정이었으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세워지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니 두 빌딩이 라이벌이 아니 될 수가 없겠다.
‘킹 콩’ 못지않게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을 만인의 가슴에 뚜렷이 새겨놓은 영화가 ‘잊지 못할 연정’(An Affair to Remember)이다. 여객선에서 만난 각자 임자가 있는 니키(케리 그랜트)와 테리(데보라 카)는 배가 뉴욕항에 도착하면서 6개월 후인 7월 1일 하오 5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때까지 서로를 못 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6개월 후 테리는 약속장소로 달려가다 교통사고로 쓰러진다. 니키는 천둥번개가 치는 속에 빌딩 꼭대기에서 밤이 늦도록 테리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선다.
이들 영화와 달리 크라이슬러빌딩은 주로 영화의 이스태블리싱 샷(첫 장면)이나 잠깐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비쳐져 주연인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의 조연 취급을 받고 있다.
크라이슬러빌딩이 주연급이다 시피하게 묘사된 영화가 스릴러 ‘Q‘(사진)다. 영화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하늘을 나는 선사시대의 거대한 뱀이 맨해턴을 박살내면서 크라이슬러빌딩 꼭대기에 알을 까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거구의 고릴라로 유명해졌다면 크라이슬러빌딩은 커다란 날개를 가진 뱀으로 그나마 알려진 셈이다. 그런대로 헐한 재미가 있는 컬트무비다.
크라이슬러빌딩은 이 밖에도 ‘스파이더-맨’ ‘멘 인 블랙’ ‘아마게돈’ ‘디프 임팩’ ‘인디펜던스 데이’ 및 ‘고질라’ 등에도 출연했다. 2008년에 아부 다비 투자회사가 8억달러에 산 크라이슬러 빌딩의 연 부지 임대료는 작년에 3,250만달러로 2028년에는 무려 4,100만달러로 오른다고. 이 역사적 건물이 과연 누구에게 얼마에 팔릴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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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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