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산골의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
이곳 미국에서 한인사회와 멀리 떨어진 시골길을 가다가 한글이 적혀있는 간판을 만나면 그 기분이 어떨까?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뭐 그럴 것 같다. 버지니아 주의 한인타운이라 할 수 있는 애난데일에서 두 시간 반 떨어진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롬니(Romney)에 그런 간판이 있다. 그 간판에는 영어로 BLUE RIDGE ORCHARD, District of Blossoming Valley라고 적혀있고 한글로‘꽃피는 산골’이라고 적혀있다. 가끔 그 간판을 보고 이곳에 들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여기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고국 풍정(風情)의 산장 과수원이다. 평화로운 휴식공간을 표방하는 곳.
問余何事栖碧山 (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나 마음은 한가롭네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니
이곳은 별천지 인간 세상이 아니어라
-2개의 정자와 글귀
‘꽃피는 산골’로 가려면 롬니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50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길 오른쪽으로 나있는 미들 리지 로드(Middle Ridge Road)를 따라간다. 길 이름이 말하듯이 꽤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가는 길이다. 이것은 ‘꽃피는 산골’이 자리한 곳의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열 마리가 넘는 강아지가 맞이해주는 ‘꽃피는 산골’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다. 이 과수원의 생활터인 서벽산장에서 올려다보는 높은 곳에 정자 하나가 있고, 여기서 내려다보는 곳에 또 하나가 있다. 높은 곳에 있는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낮은 구릉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멀리에는 어깨에 어깨를 잇댄 산들이 이어져 있다. 그 풍경은 좀 쉬라고, 잠시 멈추라고 말을 건넨다. 이 정자에 앉아있으면 ‘거참, 신선이 따로 없군…’하는 생각이 든다. 이 정자에는 작은 이정표가 있는데 거기 적혀있는 글귀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낮은 곳에 있는 정자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인데 앞에 연못을 두고 있다. 이 연못에는 동네 사람들이 낚시를 해서 손맛만 본 후 그 잡은 고기들은 이 연못에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5월 중순의 연못가에 올챙이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 머잖아 여기서 울리는 개구리 소리가 저 위의 서벽산장까지 울려 퍼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박일호 대표가 15년 가꿔
‘꽃피는 산골’은 70대 중반 연세의 박일호 대표께서 지난 15년 세월을 바쳐 가꾸어 온 곳이다. 대봉감, 대추 등을 고국에서 직접 수입해서 심은 것이 북미주에서 처음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묘목을 미국내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고국에서 직접 수입해서 심은 것이다 보니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해외에서 묘목이 들어왔기에 일년에 두 차례 미국 농무성 사람이 나와서 살펴본다고 한다. 그리고 웨스트버지니아 대학 곤충학과의 박용락 교수의 산학협동연구 농원이기도 하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2,500이 넘는다는 과실수가 자라고 있는 ‘꽃피는 산골’. 다가오는 6월에 체리가 익는 것을 시작으로 7월에는 살구, 자두, 복숭아가 나오고 8월부터는 배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9월부터 11월까지는 사과, 밤, 감, 대추, 머루, 다래가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 가히 과실천국이다.
‘꽃피는 산골’의 본부격인 집에는 서벽산장(栖碧山莊)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 이름은 중국의 시인 이백의 시에서 나왔다.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그 시(위 참조).
이 시의 첫 문장 마지막 부분이 ‘서벽산’이다. 여기에 장(莊)을 더하면 서벽산장이 된다. 서벽산장의 주인인 박 대표께서는 상당한 필력의 소유자로서 책도 여러 권 내셨다고 한다.
서벽산장과 과수원(왼쪽), 입구에 한글 간판이 보인다.
-흰머리독수리를 만나는 관광열차
이왕 ‘꽃피는 산골’을 찾아 롬니에 왔으니 롬니 구경을 좀 더 해보기로 한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관광열차. 롬니 시내를 가로지르는 50번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28번 도로를 따라가면 5분도 안 떨어진 곳에 관광열차가 출발하는 와포코모 기차역(Wappocomo Station)이 있다.
워싱턴 지역에서 관광기차가 운행되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여기의 롬니이고 다른 하나는 매릴랜드 주의 컴버랜드이다. 양쪽은 각각 관광의 묘미가 다르다.
이곳 롬니는 산자락을 따라 강을 따라 난 철로를 운행하는데, 미국을 상징하는 흰머리독수리 서식지를 지난다는 것이 인기 요인이다. 그러므로 이 기차를 탈 때에는 망원경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 서식지 뿐만아니라 하늘을 기차를 따라 하늘을 날고 있는 흰머리독수리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차는 5월에서 10월 까지 운행하는데 9월까지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1회씩 운행한다. 그러다가 단풍이 시작되는 10월은 매일 한 차례 운행하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은 두 차례 운행한다. 평소에도 인터넷 예매가 가능한데 특히 10월에는 예매가 필수일 것 같다. 디젤기관차가 열차를 끄는데 중년 사내의 힘찬 중저음 같은 그 기관차 소리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차 코스와 종류
코스는 모두 세 종류가 있다. 가장 자주 운행하는 트로프(Trough) 관광은 35마일을 세 시간에 걸쳐 왕복하고, 격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운행하는 그린스프링(Green Spring) 관광은 25마일 거리를 1시간 반에 걸쳐 왕복한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운행하는 종일(All-Day) 관광은 76마일을 8시간에 걸쳐 왕복하는데 이 코스는 피터스버그(Petersburg)에서 하차해서 구경한 후 다시 승차하는 것 같다.
이 관광열차는 네 종류의 탑승형태가 있다. 라운지처럼 생기고 식사가 제공되는 클럽(club), 우리가 흔히 보아온 전통적인 기차 칸의 형태인 1920년대식 코치(coach)가 있다. 좌석지정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찍 승차하는 것이 좋고 이왕이면 매표소 쪽 창가가 아니라 28번 도로가 보이는 창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조금더 역동적인 사람들을 위해 의자 없이 창을 크게 만들어서 바깥 풍경 관람을 극대화한 관람칸(observation car)이 있고 더 나아가 아예 뚜껑까지도 없애버린 칸(gondola car, 6세 이상만 이용 가능)이 있다. 기차 내부의 난방이 약해서 늦가을의 경우에는 옷을 좀 챙겨입는 것이 좋고, 곤돌라 카에 있으면 바람을 온몸으로 맞기 때문에 체온유지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한다.
관광열차에서 내렸으면 그냥 집으로 가지 말고 그 옆에 있는 가게에 들러 볼 것을 추천한다. 마당에 옛날 농기구들이 전시되어있는 Mountain Tyme Arts & Crafts라는 이름의 가게인데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이들도 좋아할 만한 것들이 있다.
롬니 관광열차(왼쪽)와 인디언 흙무덤 입구.
-죽음 앞에서 삶을 생각해보는 인디언 흙무덤 묘지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 글귀를 아시는지. 호디에 미히, 끄라스 띠비. 주로 묘지에서 볼 수 있는 글인데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는 말이다. 오늘은 내가 죽음을 맞이하여 여기 묻히지만 내일은 당신이 죽어서 묻힐 차례라는 말이다. 살아보면 알지만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럼에도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 하나는 공평하다. 결국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 그 공평함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귀이다.
우리 문화는 묘지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미국은 묘지가 생활공간 가까이에 있어왔다. 마을에 교회가 있고 그 교회 한 켠에 묘지가 있어왔다. 죽음과 삶이 한 자리에서 공존한다. 삶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지금 현재 이곳의 삶을 충실히 살아낼 것을 다짐하기에 딱 좋다.
롬니에 있는 옛 공동묘지도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롬니 시내를 관통하는 50번 도로를 따라 <꽃피는 산골>쪽으로 가다가 도시가 끝나는 듯한 지점 오른쪽에 묘지입구가 있다. 입구 바로 앞에 있는 길이 롬니초등학교(Romney Elementary School)로 들어가는 School St다.
미국 살면서 다른 마을에 갔다가 묘지를 만나면 대개 들러본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고맙고, 내 앞에 있는 이 삶을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50여년 전 외할머니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얘야,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거란다.” 그렇다. 일단 살아서 숨쉬고 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큰 복이 아닌가. 거기에 보람을 더해야 하리라. 묘지에 가면 항상 생각한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남북전쟁 당시의 포대 옛터
롬니 시내와 ‘꽃피는 산골’로 들어가는 미들 리지 로드(Middle Ridge Rd) 사이에 있는 산 위에 남북전쟁 당시에 구축된 포대(砲臺)가 하나 있다. 1863년에 구축된 포트 밀 리지(Fort Mill Ridge)라는 이름의 포대가 있는 지역은 포트 밀 리지 야생관리지역(Fort Mill Ridge Wildlife Management Area)로 지정되어있어서 입구 간판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간판을 지나자마자 급경사에 급격한 구비의 언덕을 올라가면 작은 주차장을 만나는데 그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바로 포대 옛터이다. 한 바퀴 돌면서 볼 수 있게 되어있고 곳곳에 안내문이 있어서 이해를 돕는다. 이 포대에서 내려다보면 서쪽 계곡이 한눈에 들어와서 그쪽을 통제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전투요지가 되고, 포격을 위해 진지를 구축하게 된 것이리라.
여기는 대포를 설치하는 포대와 그 주위를 둘러싼 참호가 볼거리인데, 이런 곳에 오면 그 옛날 이곳에 있었던 그 사람들을 생각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성이는 전장에서 그들은 집과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영화 <던커크>(Dunkirk)에 그런 장면이 있다. 독일군에게 밀려 던커크 해안에 고립되어있는 연합군을 구하기 위해 민간선박이 던커크로 접근하는데 그 민간선박들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고급장교에게 그 옆에 있는 장교가 묻는다. “뭐가 보이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집(Home)…” 이 진지에서 산 밑을 내려다보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 아닌가. 그들도 가족이 있는 집을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했을 게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기를 그 얼마나 기원했을 것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또 하나의 약수터 이야기
마지막으로 약수터 이야기 하나 더. 롬니 시내에서 ‘꽃피는 산골’ 방향으로 가는 50번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채석장이 있고 그 채석장 입구를 지나자마자 건물 몇 채가 있다. 그 건물에서 약 1,000피트(약 300m) 더 가면 오른쪽에 하얀 파이프가 박혀있고 거기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별도의 주차장이 없기에 그냥 도로에서 비켜나서 길가에 사이에 주차를 해야 한다. 마치 간이 약수터처럼 생겼다.
아쉬운 점은 거기 세워진 안내문에 ‘unsafe’(안전하지 않음)라는 단어가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약수터라고 이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사람들이 주차를 하고 물을 받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안내문에 있는 ‘unsafe’는 카운티 정부의 우려를 적어놓은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꽃피는 산골 (District of Blossoming Valley)
○방문 가능 일시 : 수요일-토요일, 아침 8시-저녁 6시
방문시 예약 필요, 입장료 없음
○인터넷 : http://blossomingvalleyorchard.com/
○주소 : 156 Days Gone By Lane, Romney, WV 26757
○전화 : (대표) 304-822-8008 (셀) 703-939-0655
애난데일에서 130마일, 2시간 반 정도 거리
◆포토맥 독수리 관광열차 (Potomac Eagle Scenic Railroad)
○인터넷 : www.potomaceagle.info
○주소 : 149 Eagle Dr, Romney, WV 26757
○차비(트로프 트립의 경우)
- 클럽 110 달러
- 코치 13-59세 50달러, 60세 이상 45달러, 4-12세 20달러, 4세 미만 무료
- 주차 : 무료
◆인디언 흙무덤 묘지 (Indian Mound Cemetery)
○좌표 :39.343291N, 78.765711W
○입장료 없음
◆포트 밀 리지(Fort Mill Ridge)
○주소 : 19-1 Fort Mill Ridge, Romney, WV 26757
○좌표 : 39.326720N, 78.796868W
○입장료 없음
◆약수터
○좌표 : 39.334245N, 78.807670W
<
글/사진 김성식 (VA, 스프링필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