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3년, 전쟁 65년의 한반도는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분단 이전에도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주의 치하였으니 소설 ‘태백산맥’이나 ‘토지’에서처럼 누가, 어디까지가 적이고, 아군인지, 오랫동안 한동네 지기끼리도 그 ‘갈등과 불신’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누룩처럼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헛웃음일 수밖에 없었고, 열심히 일해서 부귀를 누리고 있다한들 ‘사돈네 논 사는 것’이 되어버린다. 가끔씩 세계 속의 한국이 어떻고, 국가적 자긍심도 가져 보지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못 느끼고 살아왔다면, 또 일부러 외면하고 회피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숙명을 저버린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받고 성장했던 그 모든 환경, 국민 개개인의 삶과 인생에 이 ‘분단’의 상처는 전 민족에게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어왔다. ‘국민의 4대 의무’인 근로, 납세, 교육, 국방, 어느 것 하나 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이 나라에 태어난 숙명이었고, 바로 ‘분단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구름이 떠있는 것은 잘 보일지라도 그 꽃이 피는 땅, 그 새가 앉아 있을 나무, 그 모두를 넘나드는 구름의 ‘존재적 고뇌’라는 걸 알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당장 살아가는데 지장을 못 느끼듯이 ‘통일’의 문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을 먹어도, 잠을 청해도, 하늘을 바라봐도, 항상 뭔가 개운치가 않았고, 더군다나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듣고, 투표를 할 때에는 울분과 분노, 실망과 허탈 속에 좌절해야만 했던 수많은 이 땅의 지성들은 이런 ‘근원적 고통’과 ‘순교자적 사유(思惟)’에서 벗어나려 하기 보다는 그 방법과 도리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들에 간단(間斷)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 인문학의 종착점은 이른바 ‘분단 극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많이 잊혀지고 지워져 있지만 여전하게 이의 실행을 위한 ‘통일실천 방법론’이 사회과학 바탕에 항상 전제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선통일(先統一) 후민주(後民主), 또는 선민주 후통일, 최근의 남북한 현실이 생소하게 보이는 어떤 분들에게는 아주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먼저 ‘선통일론’이다.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빚어졌던 제 모순의 우산 꼭지에는 분단이 그 원인이므로 반민주, 반민족, 반통일, 소외와 차별, 분노와 갈등 등은 통일만 되고나면 일거에 해소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일생을 고고하게 헌신해 온 분들이 주장하는 바다. 심지어 남한에서의 민주정부의 탄생, 좌절도 그 구조적 단초는 결국 분단이므로 이의 근본적 해결이 없는 제반노력은 격화소양(隔靴騷痒)일 뿐이라는 것이다. 논리적이다.
하지만 이상적이라고 보는 일견들이 여전했다. 해방조국 하에서 반통일 세력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매도당했던 그래서 이번 ‘판문점선언’에서는 차마 할 말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만감이 서린 분들이다. 그 동안 체제에 안주하여 주머니 속 동전만을 다스리도록 체화된 수많은 비민족적 지식인들을 뒤로 하고, 아무리 상황이 뒤틀리고 꼬이더라도 죽기 전에 그날만을 기리며 신념하나로 견뎌내신 분들이 계신다. 그래서 이번 ‘0427 판문점 선언‘을 바라보고 있을 대부분 연로하신 ’분단 1세대 통일원로‘ 분들에게 일생의 선물과 기쁨이 되도록 마음을 다시 다져 잡고 싶다.
‘선민주론’은 점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제사회의 복합적인 상황이 현실적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고, 이런 상황들을 오직 자신들만의 정치적 입지 구축에 이용해 온 남북한 양측 위정자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우선 남한내부에서 진정한 정권교체를 이룬 다음에 통일에 접근하는 것이 순서라고 보는 견해가 이것이다. 이제 미국은 물론 일본마저도 이번 판문점 선언을 ‘세기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비통일적인 모습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국민들이 이런 견해에 이제는 동의하는 듯하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모든 전 현직 대통령들에게는 똑같은 기회와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었다.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더 민족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위치이다. 지금 생각하면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전쟁구름’이 한반도에 드리워지고, 어떤 때는 평화와 번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은 남쪽이 누구냐에 따라서 확연하게 달라졌다. 어쩌면 처절하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고, 그래서 한없이 진지해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선민주 후통일이 일단 맞았다(?)라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고난의 그 길을 몇 걸음 앞서 걸어가야만 했던 선각자의 염원은 이제 민족사에 기록될 것이다.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지금은 8천만 겨레가 ‘평화와 번영’으로 하나 될 역사적 시간위에 서있다는 것만은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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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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