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봉희의‘클래식 톡톡(Classic Talk Talk)’
전문 연주자라 하더라도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실내악(Chamber Music)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두 시간 가까이 되는 독주회에서 피아노는 작품 전체를 외워서 연주한다.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의 대보표(Grand Staff)가 포함된 피아노 악보는 바이올린처럼 한 줄인 선율악기의 악보에 비해 외울 것이 훨씬 많다.
독주회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한 최초의 인물에 대해서는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라는 설과 로버트 슈만의 부인이었던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이라는 설이 양립한다. 사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1837년, 최초로 독주회에서 악보 없이 연주한 인물은 클라라 슈만이다. 그는 외워서 연주하면 힘찬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1840년대부터 리스트는 자신의 독주회 프로그램 반 이상을 외워서 연주하기 시작했으니, 오늘날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을 당연시 만든 것은 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스트 탄생 200주년 기념 리사이틀을 가졌던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리스트가 암보를 해서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리스트는 ‘리사이틀(Recital)’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독주회를 뜻하는 리사이틀(recital)은 불어인 ‘reciter’에서 유래 한 것으로 ‘외운다’는 의미이다. 악보를 외워서 연주한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며, 음악적 카리스마를 북돋아주기도 한다. 연주자가 눈을 지그시 감고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은 환상적이기도 하다. 악보를 넘겨 주는 사람 없이 연주자가 연주에만 집중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2015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 무대에 올랐던 중국의 피아니스트 윤디 리(Yundi Li, 1982~)가 악보 중간을 뛰어넘거나 박자를 틀리는 실수를 했고 오케스트라는 결국 연주를 멈췄다. 윤디 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2000년 당시 최연소 우승자로 세계적 스타가 되었던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 콩쿠르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가진 연주자이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악보를 외우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각자 암기능력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음표, 리듬, 악상뿐만 아니라 그 작품의 음악적 언어를 분석해 그 모든 것을 통째로 외워서 연주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작업이다.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도중 실수로 박자를 놓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앞서 언급했던 윤디의 실수가 바로 그러하다. 연주자도 사람이기에 연주 도중 실수를 하고 관객들도 물론 그것을 수용한다. 관객들은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윤디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팬 사인회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한마디 사과도 없이 자리를 떠서 많은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피아노는 악보 없이 연주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하지만 암보에 대해 모든 연주자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였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 1915~1997)는 악보를 외우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악보를 외우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매번 비슷한 곡들만 연주하기 보다는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자주 하며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연주자가 연주를 위해 악보를 외운다는 것은 엄청난 고문이다. 그래서 였을까?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전자악보가 등장해 연주자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아이패드와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전자악보를 보면대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것이다. 현재 전자악보는 연주자의 연주를 듣고 컴퓨터가 알아서 악보를 넘겨주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관객들의 점수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 때문인지 이제 전자악보는 공연장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것은 연주자들에게 계속 주어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훗날 독주회에서 악보 없이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마주하게 되면 그날의 연주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그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주길 바란다.
<
이봉희 피아니스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