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번째 방문국 프랑스
▶ 파리 개선문 아래 세워져있는 한반도 모형 한국전 기념비‘감격’
파리 인근 생망데 시장실에 있는 한국전쟁참전군협회 기와 함께 프랑스참전군인과 기념촬영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로 떠나는 날 아침 생각지도 못한 영광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에르나 헤니콧-쇼프케스(Erna Hennicot-Schoepges) 전 룩셈부르크 국회 의장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주신거다. 문화부 장관을 지내시고 룩셈부르크 대학을 창립하셨으며 현재 75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정치계에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헤니콧-쇼프케스 전 의장님은 내가 룩셈부르크에 와서 참전군인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협회를 통해 듣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자 만나고 싶었다고 하셨다. 세계 최고위급의 여성 지도자께서 직접 응원을 해주셔서 영광이었다. 그분께 룩셈부르크에 있는 한국전쟁기념비가 유명한 관광지 한 가운데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느낌도 전했다. 내가 지금까지 방문한 대부분의 나라에 있는 한국전 기념물은 콜럼비아같이 국방부 안에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아예 갈 수 없거나 변두리나 시 외곽에 있어서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 초라하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열차로 프랑스로 이동한 다음날 참전군인 할아버지 3분을 만났다. 만나는 장소는 파리 동쪽에 있는 부유층 도시인 생망데(Saint-Mand?)의 시장실이었다. 할아버지들께서 영어를 못하셔서 통역을 해주실 미아 언니와 함께 갔다. 미아 언니는 한인 지도자로서 프랑스 정치인들과 오랫동안 일을 하신 분이고 한국의 헌법기관인 민주평통 해외지회 자문위원이기도 했다. 참전용사들과도 10년 넘게 교류하며 관여하고 있어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파리 개선문 아래에 있는 한국전쟁 추념패.
다행히 미아 언니가 패트릭 보도인 참전군협회 대표와 잘 아는 사이여서 할아버지들과의 만남이 더욱 순조로웠다. 보도인 대표는 생망데 시의 시장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들과의 인터뷰는 시청 건물의 결혼식을 하는 멋진 장소에서 했는데, 한 할아버지는 “신랑(할아버지들)은 3명인데 신부(미아언니와 나)는 2명 밖에 없네”라며 농담하시기도 했다.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3천421명이 참전해서 287명이 전사했고 1천350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국에 온 프랑스 군인들은 대부분 자원한 사람들이라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을 강타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반도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서 자원했다고 한다. 3명 할아버지 중 람보트 할아버지는 약혼녀가 한국의 전투지와 결혼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가지 못했다는 일화를 소개해주셨다.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과 한국 군인 사진.
할아지들과 함께 시장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사무실에 프랑스 국기와 한국전 참전용사협회기가 나란히 걸려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보도인 시장의 전임 시장이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한국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보도인 시장도 한국전쟁 참전군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중요시한다고 했다. 전임 시장이 은퇴하셨을 대 참전군협회에서 보도인 신임 시장에게 협회의 대표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고 이후 13년 동안 회장직을 맡으며 정치권과 협회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고 했다. 영광스럽게도 시장님께서는 전쟁 당시 프랑스 부대원들이 직접 착용했던 핀을 선물로 주셨다. 드러그 자크 할아버지도 자신의 전쟁 당시 핀을 주셨다. 할아버지께서 전쟁 때 직접 착용하던 낙하산 핀이라고 설명하셨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과분한 선물에 할아버지들의 뜻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프랑스를 떠나기 하루 전 파리에서 서쪽으로 20km정도 떨어진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를 방문했다. 루이 14세가 태어난 저택과 왕족의 사냥터로 유명한 생제르맹의 숲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미아 언니와 참전군인의 아들인 로저 아저씨(참전군협회 사무총장)과 함께 갔다. 군사지역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전 프랑스 군인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국인 이름을 발견했다. 1953년 프랑스 부대와 함께 작전하다 사망한 한국군인 18명의 이름도 함께 추모벽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들은 프랑스와 한국군 전사자들의 이름이 가득한 벽 앞에 이름들 위한 추념을 한 뒤 다시 파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생제르맹앙레의 한국전쟁 희생자 추모벽 앞에서.
개선문은 파리의 상징이자 프랑스를 방문하는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때 희생당한 프랑스인을 기리는 곳이기도 한데 많은 사람들이 모르겠지만, 이곳에도 한국전쟁을 위한 기념물이 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묘가 있고 1차 세계 대전을 상징하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만 한국 전쟁 기념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프랑스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게 한반도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의 기념비는 탑이나 동상이 대부분인데 디자인의 나라 프랑스여서인지 한국 지형을 기념비로 세워 놓았다. 한반도에 38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38선이 짧은 시간 안에 지워지기를 기도했다. 프랑스의 여정을 끝내며 이탈리아로 이동을 준비했다. 항상 새로운 나라를 갈 때는 기대와 긴장과 걱정이 들지만 이탈리에는 생존해 계신 할아버지가 단 한 분 계신다고 들었다. 그 분과 만나기를 기대하며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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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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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서 대대는 미2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서, 1951. 12 에서 1952. 4월말까지 금화에서 인접부대 로 (적, 오성산) 서 인연과 에피소드도 많다. j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