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림받은 세계에서 무한히 작아지는 내 모습을 보았노라”
-자욱한 아침 안개에
아침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계곡이 고요하기만 한데 새벽을 깨우는 군상들. 새벽 3시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코카 차 배달의 룸서비스. 그 한잔으로 걸음의 하루를 엽니다. 오늘의 일정은 이른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조식 후 캠핑장을 출발하여 5시 등록소를 통과해 비탈길을 두어 시간 열심히 오르면 Inti Punku 전망대에 올라 차오르는 잉카의 태양이 신전 마추픽추를 비추면 그 신비스런 전경을 조망하고 곧장 내려가 마추픽추 경내에 들어 망지기 지점에서 마추픽추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감상하고 내려갑니다.
트레커들은 들어선 마추픽추 경내에서 정문으로 나왔다가 다시 입장을 하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물론 입장료를 내고 예약한 입장권을 제시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자욱한 아침 안개 때문에 마추픽추의 일출도 망지기 집에서의 조망도 볼 수 없는 불행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잉카의 일출을 고대하며
오늘은 마추픽추에 들어갑니다. 지구촌 오지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 길을 힘들게 걸어온 트레커는 단순히 열차나 버스를 이용하여 방문한 관광객들이 느끼는 감동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가고 싶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갈 수 있다고 누구나 종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무엇보다 자신이 자랑스럽고 주변 친지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은 심정. 그 자랑이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셀카 놀이를 마음껏 하며 이 시간들을 즐기라 합니다.
그런 여유도 잠깐 다시 연속되는 비탈길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숨이 턱 아래 차고 다리 근육이 뻣뻣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인티 푼쿠에서의 마추픽추 일출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지루하다 싶은 열대우림의 젖은 숲길을 걸으며 비밀의 성지인 마추픽추. 오래된 문명의 길인 잉카 트레일을 발견한 그 빙엄 교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 심정으로 이 좁고 험한 길을 갑니다. 기실 잉카 트레일은 그저 그들이 만든 수만 킬로의 일부일 뿐. 길도 생명력이 있어 피고 죽는 윤회를 거듭합니다. 제국의 전령사 차스키들이 쉬어가던 곳에서 우리는 찬연한 잉카의 일출을 기대합니다.
-안데스의 산자락에 깃든 평화
여명을 헤치며 여행이 아닌 삶의 길로 가뿐하게 스쳐 걷는 원주민들. 이들을 만났을 땐 우리의 숨가쁨이 무색해집니다. 수천 미터 산 위에 닦아놓은 잉카인들의 삶.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변치 않는 삶을 확인하며 걸어온 길. 안데스의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잉카인들의 모습을 감동으로 바라보는 어제와 오늘이 엉킨 시간속의 여행이었습니다.
세대를 넘고 시간이 흘러도 이 깊고 높은 곳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사람들 때문에 자신도 함부로 변하지 못한 자연이 있으니 사람과 자연은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영원히 하나가 되어 살아가게 되나 봅니다. 이방인의 시선에 들어오는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고 표현하면 한편으로는 경이로 다가온다고 한다면 그들에겐 미운 말이 될까? 시간조차 게으르게 흐르는 안데스의 산자락엔 평화가 가득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이곳 사람들과 자연의 관계. 슬쩍 나도 꼽사리 낄 순 없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이 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는 최고의 수확이 될 텐데….
-3박4일만에 도착한 마추픽추
인티 푼쿠의 일출 조망은 포기하고 마추픽추를 만나러 내려갑니다.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완전한 모습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4천의 높이 잉카의 길을 3박 4일간 고소와 싸우며 걸어 왔습니다. 문명을 앞세워 쉽게 올수도 있지만 우리는 바람 따라 구름타고 쉬며 자며 꾸준히 걸어왔습니다. 가슴이 뛰고 다리엔 다시 힘이 충전됩니다.
완벽한 계획도시가 만들어진 이 불가사의한 경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 먹먹함. 무엇이라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 진한 감동. 이런 가슴 뿌듯한 성취감과 만족감은 정으로 다독이며 함께 힘들게 걸어 온 트레커가 아니고는 감히 누구도 나눌 수 없는 우리들만의 벅찬 감동입니다. 어쩌면 트레킹의 경험이 다소 부족한 이번 대다수의 참가자들에게는 분명 평생을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회억하며 삶의 힘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2백톤이 넘는 거석들
태양의 중심. 쿠스코는 도시의 형상이 달리는 퓨마를 상징하고 마추픽추는 비상하는 콘도르를 그렸다 합니다. 곁의 젊은 봉우리로 불리는 와이나픽추와 달리 그저 늙은 봉우리로 이름지어 놓은 마추피추는 의문투성이의 수수께끼로 남아 우리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침략자들의 수탈과 공격을 피해서 깊은 산속에 세운 새로운 삶의 터. 군사훈련을 위해 세운 요새. 복수하기 위해 건설된 비밀도시.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이곳 마추픽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으며 2백 톤이 넘는 거석들로 정교한 다면체로 쌓아올린 “태양의 신전” 등은 별다른 흔한 연장 하나 없이 나무와 물만으로 돌을 두부 자르듯 다루었던 잉카인들의 석재기술을 보자면 가히 경악으로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자신의 손으로 지은 도시와 길을 자신이 부수고 돌아서야 했던 잉카인들의 슬픈 역사가 동틈 사이사이에 깃든 것 같아 가슴이 싸해지는데 마추픽추는 통한의 심정으로 지켜내야 할 진정 인류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순례의 시인 파울로 코엘료는 이 마추픽추에 올라 버림받은 세계에서 무한하게 작아지는 내 모습을 보았노라고 노래했답니다. 물을 잘 다스리고 자연을 잘 이용한 인디오 민족이 성했음을 보여주면서 불가사의한 인류의 유산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문명을 찾아서 나선 여정 잉카 트레킹. 그 문명과 또 그 사람들마저도 그곳 그 자리에서 영원하고 있었으니 찾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건방진 어폐일 뿐입디다.
-하루 방문객 500명으로 제한
마추픽추를 내려다보고 있는 더 높은 산봉우리인 와이나픽추를 오르기 위해서는 미리 예매(85달러)를 해야 합니다. 꼭 와이나픽추에 올라야 하나 갈등을 하겠지만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오를 것을 권하지만 이 길은 거의 네발로 기어가는 수준이며 하늘로 수직으로 뻗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태양에 조금 더 가까이 닿고자 했던 잉카인들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마추픽추의 전경. 단연코 망지기 터에서 내려다보는 맛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페루 정부는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잉카트레일 하루 방문객 수를 500명(가이드 및 도우미 포함)으로 제한하고 있어 사전 예약은 필수인데 보통 몇 개월 전에는 예약하는 것이 좋으며 또 매년 2월 한 달 동안은 유적지 보수를 위해 잉카 트레일을 운영하지 않으니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마추픽추에 들어서 보면 그 구호가 상술에 지나지 않은 듯한 인상을 피할 수 없이 인파들이 물결칩니다. 잇속을 챙기는 허구의 외침 같아 씁쓸한 심정으로 하산하게 합니다.
-세계 3대 트레일
비 오는 아구아스 칼라파테. 기차의 종착역이자 마추픽추 오름을 시작하는 길이자 마감하는 길의 소읍. 마추픽추에서 아구아스 기차역까지 걸어서 내려오든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오든 그것은 우리들의 선택이지만 걸음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이들은 그 가파른 길을 두발로 지탱하며 내려오기도 합니다.
마을 식당에서 피자를 시키고 한없이 삼켜지는 맥주를 시켜 우리들만의 완주 자축연을 벌입니다. 페루 전통 칵테일 피스코 사워도 한 모금씩 맛보며 말입니다. 아무래도 단연 돋보이는 행사는 완주 증명서 수여식. 4일간의 전 구간이 그려진 그림지도의 배경위에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쓰인 증서를 받아들고 감개무량한 표정 뒤에 길고 험했던 길을 되돌아보며 만감이 교차됨도 함께 엿볼 수 있습니다.
다함께 대한민국을 외치고 의식을 마감하는데 기차 시간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어 뜨거운 물의 샤워와 노독이 쌓인 몸을 풀어주는 한시간반짜리 마사지를 받습니다. 문명인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리 길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산촌. 기차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어둠이 천천히 내리고 가게에는 불이 하나 둘씩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히말라야 ABC(안나푸르나),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렉과 함께 세계 3대 트레킹의 하나로 존망 받는 잉카트레일.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이 두발로 걸어 잉카인들의 옛길을 완주했다는 자긍심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어두운 차창을 스치는 높고 낮은 안데스의 산들. 이 시간이 지나가면 아름다운 동행들도 제 갈 길로 돌아가고 이제는 아무도 함께 하지 않을 나만의 인생길을 갈 것입니다.
노스 베모스(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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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박춘기(미주 트레킹 대표, mijutrekk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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