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이 볼썽사납게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건반 위에 올려놓은 모든 왼 손가락은 사시나무 떨 듯 흔들렸다. 그 중에서도 엄지는 중풍을 맞은 환자보다도 더 흔들렸다. 아예 팔 전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어깨도 온 근육이 뭉쳐진 것처럼 묵직하게 내려 누르기 시작했다. 오른손은 아무 이상 없는데 떨리는 왼 손가락과 아픈 어깨 때문에 도저히 침착하게 연주를 할 수 없었다. 간신히 한 줄을 엉터리로 대충 두드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왼쪽 어깨를 돌려도 보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주물렀지만 마찬가지다.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이가 70이 넘었어도 마음은 젊어서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피아노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자 키보드로 그냥 쉬운 노래라도 흥겹게 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이번 주가 두 번째였다. 내가 교장 직을 맡고 있는 학교에서 키보드 연주 강의가 있어서, 전자 키보드도 사고 등록금도 선선히 내고 강의를 신청하였다. 첫 날 강사 말에 의하면 12주 동안 부지런히 배우면 쉬운 노래는 대충 연주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은 벌써 카네기 홀에 가 있었다. 첫 강의를 듣고 집에 와서 피아노로 숙제를 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몸과 머리가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기껏해야 건반에 있는 음표 7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밥도 못 먹는 병신이나 다름없다고 건성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두드려 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60세에 은퇴하면서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피아노를 오래 연주한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친구의 답은 확고했다. 자기는 내가 하는 것에 말리지 않겠지만 절대로 찬성하고 싶지 않다고. 악기를 하나 완전히 배우려면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러느냐고. 이왕 퇴직했으니 여행이나 다니고 즐겁게 지내란다. 잊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의 버릇대로 친구가 준 충고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무리수를 두어 버렸다. 이젠 되돌릴 수도 없다. 한 번 시작한 일이니 죽이 되거나 밥이 되거나 끝장을 보고 싶어서 아내의 눈치를 봐 가면서 시도 때도 없이 피아노 앞에서 열심히 두드렸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내가 피아노라고는 서울에 유학을 와서 숙부 댁에서 처음 봤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하나밖에 없었던 풍금이 내가 아는 악기의 전부였다. 어느 날 숙부 댁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피아노를 만져봤다. 시골 촌놈이 호기심에 칠 줄도 모르는 피아노를 가지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것저것 눌러보면서 신나게 놀다가 사촌 누나가 집에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호랑이 같은 누나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도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내가 결혼해서 아이들이 있으면 곡 멋진 피아노를 사주어 음악을 시켜야지 하면서 그 결심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한 후에야 잠이 들었다.
세월이 흘러 딸과 아들이 자기들만의 둥지를 틀고 잘 사는데 무슨 걱정이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접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이 나이에 피아노를 배워서 어디 나가서 연주할 일도 없을뿐더러 남에게 자랑할 일도 없다. 하지만 꿈이 없으면 어디에 기댈 데도 없다. 아주 헛되고 허망한 꿈이 아니고 1%의 실현 가능성이 있으면 한 번쯤 도전하고 싶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회란 게 저절로 굴러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과 거기에 부합하는 노력이 있어야 기회가 온다고 믿는다. 우연치 않게 시작한 키보드 연주도 무엇에 홀려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새로 산다고 하면 펄쩍 뛰는 아내도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순순히 해보란다. 누가 뭐래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게 있다면 아마 이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꾼다. 보통 자면서 꾸는 것을 꿈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이루고 싶은 일에 관한 바람을 꿈이라고 또한 부른다. 주어진 삶에 무엇을 성취한다는 것 자체는 남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이루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값진 성공일 것이다. 70 평생을 살면서 그 많던 꿈을 꾸고 없어지면 다시 꾸면서 그런 꿈은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으려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언젠가는 없어질 모래성을 쌓은 인간의 심리. 그 밑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성취감이 있어서 그러리라고 본다.
손가락이 하도 떨려 혹시 몹쓸 병이라도 걸렸는지 몰라 강의가 끝나자마자 내 담당의사에게 전화해서 상담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의사는 껄껄 웃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말했다. 겁을 잔뜩 먹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아마 평생 남 앞에서 악기라고는 연주해 보지 못했던 못난이가 쥐꼬리만큼 연습해서 배운 것을 가지고 연주하려니 새가슴보다도 더 쪼그라들었을 게다. 말이 연습이지 왼손과 오른손도 제대로 구분도 못하고 건반 위에서 술에 취한 사람처럼 여기 저기 음정과 박자도 맞지 않게 눌러대는 모습에 나도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거금을 들였는데 꿈을 접기도 그렇고. 그래, 나이가 들었다고 꿈도 없으면 산 목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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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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