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난 외손녀 카야는 운동화 끈을 매려고 현관 끝자락에 앉아 엄지와 검지로 끈을 동그랗게 잡고 있다. 이미 2분은 지난 것 같이 느껴진다. 나머지 왼쪽 끈까지 매려면 앞으로 5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급한 마음에 매어주려 하니 뿌리친다. 꿀밤을 한방 주고 싶지만 참는다. 내 딸인 제 어미는 끝까지 참아주기 때문이다. “오케이”하고 일어서는 얼굴엔 만족감으로 얼굴이 환하다. 나의 조급했던 마음도 스르르 가라앉는다.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같이 가는 길이다.
길가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서 지팡이라고 짚고 걷는다. 허리 수술을 받은 뒤에 할아버지가 어정쩡하게 걷는 모습을 흉내 내며 깔깔거린다. 걷는 아이의 뒤를 밟아가니 내가 살아온 발자국도 함께 따라온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가장 많이 후회되는 것은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많이 보듬어 키우지 못 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자상하지 못하고 성품이 급해서이기도 하지만 젊었을 때 철이 없고 아는 것이 없었다는 말이 옳겠다.
시간은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같이 뼈저리게 느꼈다면, 난 냄비의 때를 그리 빡빡 문지르거나, 냉장고를 해부하듯 꼬챙이로 후벼 파면서까지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거실의 먼지를 슬쩍 발로 밀어 놓았을 것이고, 남편의 바지를 만들어 입힌다고 재봉틀 앞에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시부모님의 말 한 마디에 바보 같이 가슴앓이를 하고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 아이들이 자라면서 번갈아 가며 치마를 붙잡고 감기려하는 것을 늘 바쁘다는 핑계로 닭 쫒듯 두 팔을 안에서 바깥으로 저으며 살아왔다. 어느새 그들은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멀리 보이는 전봇대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뒤늦게 내 가슴 깊은 곳을 그들에게 내밀어 보였지만 아이들의 관심은 이미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 버린 지 오래였다.
사람 마음이 유리병보다 더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아이 하나하나가 다 개성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성격에 맞는 대접을 해 주었을 것이다.
세 아이를 편애하지 않고 키우겠다고 생각하면서 한 뭉텅이로 취급했다. 내 자식이니 내 소유라 생각했다. 잘 되라고 한 잔소리이니 다 이해하리라 믿었고, 서운한 말도 소화시키려니 했다. 또 피는 물보다 진하므로 우리의 관계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줄 알았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것과 모든 문제는 깨어진 관계로 시작된다는 것을 한참을 살아보고서야 깨달았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아름다운 관계는 관심과 배려하는 마음이 소통될 때 이루어지는데 그게 남에게만 해당 되는 것인 줄만 알았다. 내 식구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했다. 등이 따스하고 배부른데 무슨 상처를 받느냐며 더 따뜻한 관심, 배려, 다독거림을 양육에서 잊고 살았으니 껍데기만 길렀는지도 모르겠다.
안에 있는 것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진즉 알았더라면 아이들의 마음 안에 좋은 것으로 듬뿍 채워 주려 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성공해야 한다는 욕심은 내려놓고 여행을 많이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공부해서 남 주느냐?”는 말 대신 “초초해하지 말고 많이 놀아라!”라고 얘기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멋있는 엄마로 기억될까?
칭찬 보다는 늘 부족한 것을 지적했고, 가진 것에 감사하자고 위로하기 보다는 더 성취하라고 안달했다. “친절과 사랑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라고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현하는데 부족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 하다.”는 말은 자꾸 미루며 내 마음 속에만 깊이 감추어 두었었다.
참을 걸. 아끼지 말 걸, 즐길 걸,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다시 현관 앞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실이 난장판이다. 책은 소파에 이리저리 누워있고, 퍼즐은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다. 부엌 테이블에는 색칠하는 책과 색연필이 널부러져서 자고 있고, 색색가지의 리본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웃고 있다. 가위는 하품하듯 입을 벌리고 있고, 아이가 제 일에 몰두하는 사이사이에 내가 보던 신문은 심장을 드러내고 돌아 앉아 있다. 정리가 안 되면 미칠 것 같은 나이지만 외손녀가 돌아갈 내일까지는 하는 수 없이 참아야한다.
아이는 조금 전에 힘들게 맨 운동화를 홱 벗어버리고 언제 앉았는지 하얀 도화지에 꽃을 그린다. 아까 공원에서 본 민들레란다. 위에다 ‘FLAUR’라고 쓰고 아래엔 ‘KAYA’라고 사인을 한다. 요즈음 이 아이는 제가 발음하는 대로 글을 쓴다.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이의 과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틀렸다고 인정할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는 게 제 어미의 이론이다. 절대 고쳐주지 말라는 딸의 부탁이 있었지만 입이 근질근질하다. 그런 입으로 숨을 길게 들여 마시며 “굿~”이라고 해 주었다. 딸이 철자를 틀리게 쓰면 그녀의 이마를 콩콩 때리던 옛일이 떠오른다.
싱크대에서 사과를 깎다가 뒤돌아보니 아이는 가위로 리본을 싹둑싹둑 자르고 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건 할머니가 선물 포장하려고 모아 둔 것인데…” 아이가 나를 빠끔히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왜 할머니는 별거 아닌 물건에 그렇게 화를 내세요?” 6살 손녀에게 한 방 맞고 난 어리벙벙한데 아이는 여전히 풀칠을 하느라 바쁘다. 핑크, 노랑, 파랑, 초록 리본조각들이 도화지에서 생일케익으로 살아났다.
초를 하나 꽂아야 하는데 보라색 초가 좋을 것 같은데, 보라색 리본과 불꽃으로 쓸 빨간 리본이 더 필요하단다. 리본상자가 있는 아래층에 같이 내려가자고 성화다. 옛날에 내 아이들에게 늘 하던 버릇대로 “그냥 있는 것으로 적당히 해!” 소리치고 싶지만 아이의 손에 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그래 졌다. 졌어! 생일케익이 더 중요하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할머니는 오랫동안 후회와 반성을 거친 숙련된 엄마라고 한다는데, 난 여전히 참을 忍자를 수백 번 떠올리며 아이를 보고 있다. 여전히 철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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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애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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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글이네요. 참지말고, 아끼지 말고, 즐길 것. 주변사람에게 더 소중하게 대해줄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