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U Entrance.
딸이 1972년 떠난 모교를 다시 방문하는 여행을 내 생일 선물로 만들어주었다. 12월 크리스마스에 메릴랜드에서 결혼한 내 신부에게 신혼여행으로 인디아나 대학을 방문하고 내가 가르치던 위스칸신으로 갔으니 거의 반세기가 지나 찾아간 모교로의 여행이었다. 내가 가난한 고학생으로 미국에 와 공부한 첫 4년의 청춘이 거기 그대로 화석처럼 박혀있는 마을. 모교를 잊은 사람은 없다. 인디아나 대학은 내가 미국에서 새 삶을 개척하게 만든 힘을 주었다. 인디아나 대학은 내가 대학교수로 일생을 살수 있는 힘과 여유를 주었다.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내 나이 70이 되었을 때 딸이 우리 내외를 남불로 여행할수 있도록 해주었고 스스로 통역겸 운전기사로 함께 한 10일간 여행이 잊을수 없는 여행, 그 여행만큼 이번 인디아나 여행도 잊기 어려운 여행이 되었다. 4월 21일 우리 내외는 버지니아 덜레스 공항에서 인디아나폴리스로, 딸은 뉴욕에서 인디아나폴리스로 왔다가 거기서 만나 23일 오후 우리는 덜레스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딸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헤어젔다. 비행기 예약, 호텔 예약, 렌트 카 예약 모두 딸이 해주었으니 우리 내외는 감사 외 말이 필요없다. 6년만의 딸과의 여행은 축복이었다.
인디아나 대학은 인디아나 남부 시골 Bloomington, ‘꽃피는 마을’ 이라는 대학촌이다. 3만명의 대학생이 공부하는 대학촌. 나는 그 대학에 비교행정학이라는 새 학문을 연 윌리암 시휜이라는 교수를 찾아 1968년 인디나아 대학에 정착했다. 한 학기 등록금을 벌기위해 여름은 시애틀에서 일하고 가을 학기에 블루밍턴에 도착했을 때 대학 교정의 아름다움만큼 거대규모의 대학이 나를 압도했다. 대학의 예산이 한국정부의 예산보다 많았고, 인디아나 대학 수영선수 하나가 멕시코 올림픽에서 일곱개, 여덟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오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한국은 그때 금메달 하나도 없었을 때 였으니.
여름방학에 GE, Westinghouse에서 일했고 학기중에는 술집 부엌에서 피자를 만들었고 나중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며 공부한 4년의 세월. 그 속에 잊을수 없는 은사, 친구, 방 한칸을 내준 할머니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분들은 이제 모두 타계했지만.
첫날 저녁. 블루밍턴 시청, 중심가에 있는 Hyatt Place에 여장을 풀고 우리 셋은 인디아나 대학 교정으로 걸어갔다. 대학에 정문이 없지만 아직도 대학이 1820년에 세워졌을 때 세워진 교문이 서있고 그 다음 대학총장실이 있고 행정처가 있는 건물, 옛 도서관이 있고 그 옆에 아름다운 숲이 있고 숲길이 있는 교정을 어두워지는 시간에 걸어갔다. 거기 나를 사랑해주셨던 허만 웰스가 의자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조각으로 있어서 놀랐다. 그 분이 1930대-60년대 총장으로 인디아나 대학을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웠고 그 후엔 재단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늘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격려했고 내 시화전이 끝났던 날, 내 작품을 하나 사주셨다. 그 분 옆에 앉아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가 떠날 때 시화전을 열었던 전시장이 있는 유니온 건물로 들어가 돌아보았고 지하에 있는 대학 책방에 들여 몇 개의 기념품을 사고, 내가 4년 공부한 정치학과 건물, 우드번 홀 Woodburn Hall 로 들어가 강의실과 교수실을 아내와 딸에게 보여주고 분수 앞에 나와서 다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옆에 미술대학 안에서 졸업전시회가 있어 화랑에 들어가 젊은 미술가의 그림도 보고 나왔다. 내가 공부하고 일했던 도서관을 보여 주었고 대학 정문 근처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그때는 상상할수 없었던 한국음식점, 지금 이 대학촌에 4개의 한국 음식점이 있다고 한다.
(왼쪽)Herman B Wells Sculpture.인디아나 시화전이 실린 기사 사진.
교문 바로 앞에 그때도 있었던 닉스 Nick's 라는 술집이 그대로 서 있어 반가웠다. 금요일 마다 내 친구 박용문과 함께 와 맥주와 치즈버거로 늦은 저녁 식사를 나누던 다정한 술집, 그 친구는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며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천재. 그는 나를 위해 금요일 저녁을 비워 두었고 언제나 술값과 치즈버거를 샀다. 얼마나 고마운 친구인가. 그는 연세대학으로 돌아가 거기서 은퇴하고 그의 고향 양평에서 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그 친구를 블루밍턴에 초대해야겠다.
둘째 날. 아침. 지구의 날. 내 생일, 내가 일하던 여름 공장을 찾아 나섰다. 첫 여름방학에 일했던 GE 공장이나 그 다음 여름에 일했던 Westinghouse가 다 문을 닫았다. GE는 냉장고 만드는 공장이었고 Westinghouse는 전기제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찾으니 후자는 pcb 화학물질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나온다. GE 공장 주소가 인터넷에 나와 있어서 딸은 그리로 찾아갔다. 호텔에서 공장까지 2.4마일로 나온다. 그때 나는 자전거로 시골길을 달려갔던 기억으로 왕복 10마일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데. 내 기억 속에 주소가 없으니 인터넷에 나와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60년대의 공장 주소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그후 공장이 이전했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의 공장은 아니었다. 내 기억력이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나오는 길에 딸은 내 기억을 더듬어 내가 살던 집 주소를 묻는다. 흐릿한 기억 속에 Wylie Street 이 나오고 East Wylie Street이 나온다. 딸이 인터넷 지도에 East Wylie가 나온다며 그리로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갔다. 그냥 East Wylie로 들어가니 208 East Wylie가 어렴풋하게 나타난다. 마침내 그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어느새 눈물이 아른거린다. 일주일에 10달러 방세를 내고 살았던 할머니 집. 지하실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살았던 작은 집. 할머니는 층계가 있는 정문으로, 나는 쪽문으로 출입하고 다녔는데 그 집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쓰던 방 창 밖에서 내가 세워둔 자전거가 어른 거렸다. 어느새 딸의 눈에도 아내의 눈에도 눈물이 비친다. 그 집 층계에서 사진을 찍고 물러 나왔다. 지금은 누가 사는지 모르는 집. 그 할머니의 딸이 사는지도 모른다.
점심시간에 우리는 닉스로 갔다. 내 생일 점심은 내가 4년동안 금요일마다 저녁식사를 했던 닉스가 가장 적합했다. 나는 그때처럼 맥주와 치즈버거, 아내와 딸은 다른 음식을 주문했다. 내 친구 박용문과의 우정을 아내와 딸에게 전하며. 이미 주인이 바뀐 술집이었지만 분위기는 그대로 대학촌의 술집. 다만 60년대 히피 풍의 대학생들이 사라진지 오래다. 오늘이 내 생일인지 알게 된 웨이트레스가 치즈 케이크와 커피를 내온다. 후식을 들고 우리는 내가 60년대 후반 주말 캠핑으로 다녔던 몬로 호수가 있는 숲 지대로 차를 몰았다. 한국 유학생들 몇과 텐트를 치고 주말을 보냈던 주립 공원. “나무들의 바다”라고 명명했던 그 숲지대. 지금은 신록의 달. 버지니아처럼 도그우드 꽃과 레드 버드가 신록을 받쳐주고 있다. 그때는 가을 단품이 아름다웠지만 신록도 아름답다. 블루밍턴에서 20마일 거리의 숲지대. 인디아나 남부도 아름다운 자연이다.
저녁에 인디아나 대학 극장에서 이태리 감독 로버트 안도의 영화 “고해성사”를 관람하기로 했다. 분수 앞 오디토리움 뒤편에 있는 영화관은 세계의 명화를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 신부가 세계의 경제정책을 주관하는 G 8 회의 IMF 총재의 초청으로 참석한다. 그 전야제 저녁식사를 끝내고 그 총재의 고해성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아침에 그 총재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죽음에 이른다. 신부와 그의 마지막 고백을 하나씩 풀어가는 영화. 바닷가 호텔을 중심으로 일러나는 스릴러. 신부의 녹음기에는 고해성사가 들어있지 않고 새소리들이 가득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금융가의 인물들 대화보다 새소리가 더 의미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가 끝난후 감독과의 토론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내 생일이 끝났다. 호텔에 돌아와 생일 케익을 준비했다. 촛불을 불어 끄면서 딸은 올해의 소원을 담아 불을 끄라 했다. 그래 나는 내년에도 우리 딸 아이와 생일을 보내게 해 달라고 소원했다.
셋째 날 아침. 딸은 17번가에 있는 인디아나 대학 스타디움, 유명한 농구장이 있는 어셈브리 홀(Assembly Hall)까지 달리기로 했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로 했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서 거기까지 5마일 거리. 일요일 아침에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누구라도 우리를 위해 문을 열 사람이 오기를 바라며 거기 서 있었다. 여학생이 오고 있었다. 열쇠를 갖고 있는 여학생은 대학 축구선수. 하늘이 보낸 천사 같았다. 내 딸, 아들은 나를 닮아서 스포트 팬. 인디아나에서 그 유명한 인디아나 대학 농구 코트를 보고 가지 않는다면 너무 섭섭했을 딸을 위해 하늘이 보낸 천사 였다. 그 안에 들어가 사진들 찍었다. 유명한 보비 나이트 Bobby Knight 감독이 이룬 마지막 대학농구의 무패 전승 기록을 어느 누구도 아직 깨지 못하고 있으니 인디아나 대학 농구는 빛나고 있다.
공항으로 나오던 길에 3번가 내가 가끔 다니던 장로교 교회를 찾아갔더니 거기 그 교회는 보이지 않고 한인교회가 서 있었다. 그동안 블루밍턴은 한인 대학생들이 교회를 이룰만큼 많아젔는지 모른다. 인디아나 주민의 2세들이 벌써 대학생들이 되어 교회를 이룰만큼 성장했는지 모른다. 한국 식당이 4개나 있는 마을이 되었으니.
우리는 천천이 인디아나폴리스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만났던 공항에서 다시 딸은 뉴욕으로 우리 내외는 덜레스 공항으로 가는 1시간 반이 안 되는 짧은 주말 여행을 마첬다. 76세 생일축하를 대접해준 딸에게 무한 감사를 보내며. 노스탈지어의 여행. 내 60년대, 70년대의 청춘이 남아있는 꽃피는 마을.
승희야, 사랑한다.
<
최연홍 / 페어팩스 스테이션,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