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에 놀아난 탓 때문이었는지 조류 독감(AI) 대책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탓에 2,500만 마리 이상의 닭들이 제 명에 죽질 못하고 집단으로 비명횡사를 당했다는 뉴스다. 따라서 ‘계란 대란’이라는 신문 기사의 표제마저 등장한다. 국내의 계란 생산의 급격한 감소는 외국산 계란 수입으로 이어졌고 대기업 계열의 한 수퍼마켓이 30개들이 달걀 한판을 1만원에 설 선물로 내놓았다는 보도마저 있었다.
그 보도를 보니까 필자가 어렸을 때와 20대 중반까지의 식생활 중 계란의 중요한 위치를 회고해 보게 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규모 양계 산업이나 산란 기업은 꿈꾸는 사람들도 없었던 때라서 시골이면 거의 집집마다 닭을 길러 달걀을 자급자족 했었다. 서울은 물론 웬만한 도시 사람들은 닭을 기를 수 없어 시골에서 올라오는 달걀 등을 골목의 구멍가게 아니면 시장의 식료품 가게에서 구입하곤 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살모넬라균이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한 때라서 길을 걷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구멍가게에 들러 날계란 하나를 사서 젓가락 끝으로 양쪽에 구멍을 뚫어 입에 대고 쭉 들이마시는 게 보통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달걀을 먹은 것은 아마도 1961년도에 내 아내가 될 사람과 열애 중이었을 때였을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라는 직업은 있어도 경제적으로는 쫄딱 망한 집안이었기에 셋집으로 전전하는 나를 두고 그는 “칼집” 같은 것이라도 있어야 결혼을 해 주겠다고 나를 볶아댔다. 그가 신문 광고를 하나 발견했는데 주택공사에서 7평반짜리 연립 주택을 수유리에 지어놓고 입주자들을 모집하는 내용이었다. 그 시절에는 시내버스가 망우리까지만 가던 때라 그곳에서 내려 수유리까지 걸어가 집 구경을 하고 오다 보니 거의 저녁 때가 되어 시장기를 느끼게 되었지만 시외가 되어 식당 하나도 눈에 안 띠었다.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러 날계란으로 배를 달랬던 기억이 난다.
계란이 당시에 얼마나 귀한 영양식이었던가는 내가 맹장 수술을 하고 1주일 이상 입원했던 1959년에 경험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동창생 중 아버지가 육군 경리감을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 집에 짚차 일망정 자가용이 두 대나 되는 부잣집 첫 아들이었다. 그 친구가 자기 어머님을 졸라서였던지 대바구니로 달걀을 가득 넣어 몸보신하라고 입원실로 찾아와서 한동안 계란의 향연을 만끽했던 기억이 난다.
조선일보의 김명환 전 사료실장의 최근 칼럼에서도 50,60년 전 우리나라에서 계란의 위치를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그런데 사료실장이라는 직함이 필자가 서울에 있었을 때는 없었는데 아마도 당시에는 신문기사를 스크랩해서 종류와 연대별로 분류보관하고 각종 도서를 배치하여 신문기자들과 편집인들의 사실보도와 해설기사를 뒷받침 해주던 조사부 기자들의 책임자격이라고 추측된다. 역시 그 직함을 거친 사람답게 김 씨의 칼럼에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10월에 코 수술을 받고 3일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날에 40대 여성이 병원장실로 계란 두 꾸러미(20개)를 가지고 와서 대통령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수술 받은 대통령에게 몸조리 잘 하시라고 전한 선물이 계란 20알 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계란이 오늘날 보다 훨씬 급이 높은 식품이었다는 점의 방증이다. 1968년 6월에 서대문의 10층 건물에 문을 연 “뉴 슈퍼 마키트”의 개업행사에서 당대 최고 코미디언이었던 서영춘·백금녀씨 등이 고객들에게 나눠준 선물이 1인당 달걀 하나씩이었다는 사실도 당시 계란의 위상을 예시하는 일이다.
김 씨의 칼럼은 또한 이화여대에 대한 1962년도 기사를 언급한다. ‘처녀들만의 보금자리’라는 제하의 신문기사에서는 ‘기숙사식당에서 매일 하나씩의 달걀 프라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중요한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김씨 칼럼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천주교 수원 교구장을 지낸 고 김남수 주교의 생전의 회고담이다. “내 성직생활 41년의 출발은 삶은 달걀이었다”고 김 주교는 토로하곤 했다는 것이다. 만주산골에서 보낸 소년 김남수의 어린 시절은 궁핍했지만 그의 부모는 동네성당의 신부님이 집을 방문하면 삶은 계란을 대접했단다. 소년은 신부님이 조금이라도 남기시면 자기도 그 맛있는 것을 먹으리라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건만 야속하게도 신부님이 접시를 싹 비우니까 어머니에게 달걀을 삶아 달라고 떼를 썼다가 야단만 맞게 되자 “그러면 나도 커서 신부님 될 것이다”라고 소리친 것이 결실을 맺었다는 회고담이다.
계란을 여러개 잘 풀고는 프라이팬에 넓적하게 익히는데 구은 김을 집어넣어서 여러 겹을 접은 다음 썰어놓으면 맛이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옛 생각이 나더라도 날달걀 양쪽에 구멍을 내서 들이키는 것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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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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