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연상(聯想)퀴즈 놀이가 있다. 다음 말들을 보면 어떤 단어가 연상될 수 있을 것이다. 체 게바라, 얼마 전에 타계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1789년 프랑스, 18세기 중반 영국의 산업 발전, 중국의 쑨원(孫文),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東學), 1960년 4.19 여기까지 나오면 역사에 둔감한 한인이라도 대뜸 ‘혁명’이라는 단어를 떠 올린다.
요즘 ‘혁명’(革命, revolution)이라는 말이 새삼 주목을 받는다. 지난 11월 전후로 시작된 고국의 수백 만 촛불집회를 두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한국의 ‘시민혁명’ 혹은 ‘촛불혁명’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물론 이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에 정서적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과거 혁명에 수반되었던 충돌과 유혈의 역사에 대한 기억이나 촛불 주도세력에 대한 이념적 거리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혁명의 개념에 대하여 사회적 변천을 살펴본다면 혁명이라는 말에 그렇게 민감할 필요는 없을지 싶다. 혁명에 대한 1차적 정의를 든다면 동양에서의 혁명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새로운 왕통이 이전의 왕통을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는 것을 뜻 했고, 서양에서는 피지배계급(被支配階級)이 기존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하고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일을 혁명으로 이해하였으며, 공산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곧 계급투쟁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산업혁명, 컴퓨터혁명, 정신혁명 등에서 보듯이 ‘혁명’의 의미가 사회구조 및 일상생활 전반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를 뜻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이제는 혁명에 대한 과거의 무겁고 비장한 이미지를 내려놓을 때가 아닌가 한다.
혁명의 본질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과거나 현재나 혁명의 본질은 “변화”이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낡은 것’을 바꾸어 버리자는 것이다. 진정한 혁명의 동기는 체제 전복이나 저항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 곧 인류의 진보에 있다. 이런 면을 일컬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혁명은 인류의 진보를 위한 힘’이라 하였다. 오늘의 일상적 시민의 언어로 바꾼다면 혁명은 시민 곧 인류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투쟁과 유혈이 따르던 과거의 무거운 혁명의 시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의 혁명이 지니고 있던 비장하고 어두운 색조도 경쾌하고 밝은 색으로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의 혁명은 평화롭고 경쾌하며 밝은 의미의 혁명이어야 한다. 정보통신기술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요즘은 어느 한 사람의 아이디어나 새로운 기기의 발명으로도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누구나 혁명가가 될 수 있다. 정치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면에서 경쾌하고 밝고 평화로운 혁명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런 면에서 고국의 촛불혁명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밝고 평화로운 혁명이라 할 만하다. 우선 혁명의 내용이 그렇다. 촛불집회의 목적이 단지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 퇴진에만 머물지 않고, 시민의 주권이 존중받는 사회 곧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점이 이를 말해 준다. 혁명의 방식도 신선하다. 연인원 천만여 명이 무질서나 폭력 행위 없이 평화롭게 모였고, 성숙한 시민의 품격을 유지한 백만 시위 군중, 문화적 표현과 정치적 요구가 어우러진 매우 독특한 집회였다. 참으로 밝고 경쾌하며 평화로운 방식의 혁명으로, 세계 혁명의 역사에 새로운 유형의 혁명으로 자랑스레 기록될 만하다.
변화는 혁명의 본질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이기도 한다.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변화해야 산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의 길은 결코 호락하지 않다. 안팎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거나 타협이나 포기에 머물기 쉽다. 변화에 성공하는 길은 시작의 요란함이나 거창함에 있지 않다.
아주 작은 병폐일지라도 크게 여겨 마음을 다해 바꾸려는 단호한 꾸준함에서 나온다. “어려운 일을 하려는 사람은 쉬운 일부터 하고(圖難於其易), 큰일을 하려는 사람은 작은 일부터 해야 한다(爲大於其細)”는(도덕경) 말이 있다. 새해를 맞아 더 나은 삶, 더 좋은 세상을 위하여 내 안의 나를 바꾸는 일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바꾸어 가는 ‘경쾌하며 밝고 평화로운 혁명’을 기대한다.
<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