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하고 어리숙한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안내하는 여자를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여자의 원조는 아마도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꼬드겨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삼손을 영육으로 눈멀게 만든 딜라일라와 호세의 칼에 맞아 죽은 카르멘도 이브의 후예다.
팜므 파탈은 전후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장르인 필름 느와르에서 단골로 나온 주인공들로 그 대표적 여자가 필리스 디트릭슨이다. 로스펠리즈에 사는 필리스 디트릭슨(바바라 스탠윅)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한 ‘이중배상’에서 봉같은 보험 세일즈맨 월터 네프(프레드 맥머리)를 유혹해 보험에 든 나이 먹은 자기 남편을 살해시키는 요부로 팜므 파탈 중에서도 으뜸가는 여자라고 하겠다.
소심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모리스가 넋을 잃고 욕정과 사랑에 빠지는 룰루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팜므 파탈이다. 룰루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느와르의 아들로 ‘위대한 환상’과 ‘인간 짐승’ 및 ‘게임의 규칙’ 같은 명화를 만든 장 르느와르 감독의 애욕과 기만과 살인이 뒤엉킨 삼각관계의 치정극 ‘암캐’(La Chienne·1931·사진)의 주인공이다. 원작은 조르지 드 라 후샤르디에르의 소설.
영화는 인형극 속의 인물의 “이 영화는 드라마도 아니요 희극도 아니며 또 도덕적 메시도 없다”로 시작되지만 실은 계급과 신분을 비롯한 사회적 현상과 도덕성을 다룬 코미디 드라마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사는 회사 경리사원으로 아마추어 화가인 수줍은 모리스 르그랑(미셸 시몽)은 바가지를 긁어대는 아내 아델의 엉덩이에 깔려 사는 불행한 공처가.
그의 유일한 위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어느 날 밤 회사 회식 이후 귀가하다가 길에서 자기 애인인 핌프 데데(조르지 플라망)에게 얻어터지는 젊고 섹시한 밤의 여자 룰루(자니 마레즈)를 구해 주면서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룰루는 데데와 짜고 자기에게 반한 모리스의 껍데기를 벗겨 먹기로 하면서 모리스는 룰루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회사 돈을 횡령한다.
룰루와 데데는 돈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모리스의 그림을 팔아먹는데 룰루는 화상에게 자기를 클라라 우드라고 소개하고 그림을 자기가 그렸다고 속인다. 그런데 그림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고가로 불티나게 팔린다. 모리스는 자기 그림을 팔고도 한 푼도 못 건지지만 룰루가 행복한 한 자기도 만족하는데 룰루가 데데의 애인이요 둘이 짜고 자기를 기만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 룰루를 편지봉투 여는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 살인혐의는 데데가 뒤집어쓴다.
마지막 장면이 역설적 희극으로 끝난다. 알거지가 된 모리스가 팔려서 고급 승용차에 실리는 자신의 자화상을 보면서 함지박 미소를 짓는다. 거지가 되면서 비로소 자유로워진 모리스의 커다란 미소에 체념의 예지가 가득하다. 우물쭈물하는 시몽의 뛰어난 연기와 화면 구성과 흐름이 좋은 흑백촬영 그리고 발자국 소리 등 실제 음을 쓴 음향효과 및 유효 적절히 쓴 노래 등이 모두 훌륭한 명화로 플라망과 마레즈도 잘 한다. 그런데 플라망은 아마추어 배우로 실제로는 직업 범죄자였다.
영화에서 모리스가 그리는 그림은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르느와르는 늘 아버지의 그늘을 의식하며 살았는데 이 영화를 위해 아버지의 그림을 팔아 제작비를 조달했다고 한다.
한편 마레즈는 룰루처럼 실제로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르느와르는 영화의 사실성을 살리려고 마레즈와 플라망이 실제로 사랑에 빠지도록 부추겨 둘은 애인이 됐다. 그런데 시몽도 마레즈를 사랑하면서 영화 밖에서도 삼각관계가 발생했다.
그리고 운전이 서툰 플라망은 출연료로 산 자동차에 마레즈를 태우고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마레즈가 사망했다. 방년 23세로 영화는 마레즈 사망 3개월 후인 1931년 11월에 개봉됐다.
‘암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감독 프리츠 랭(‘M’ ‘메트로폴리스’)에 의해 ‘진홍의 거리’(Scarlet Street·1945)로 리메이크 됐다. 프랑스 판보다 훨씬 어두운 가학적 영화로 병적인 염세주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주인공들은 공처가 크리스(에드워드 G. 로빈슨)와 폭력적이요 간교한 핌프 자니(댄 듀리에) 그리고 자니의 애인으로 자극적인 거리의 여자 키티(조운 베넷).
특히 상스러우면서도 치명적인 색정미를 발산하는 베넷의 모습과 연기가 눈부시다. 크리스가 잠옷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길게 누운 키티가 앞으로 길게 내민 맨발의 발톱에 정성껏 패디큐어를 해주는 모습이 선정적이다. 이 영화는 냉소적으로 끝나는 ‘암캐’에 비해 비극적 여운을 남긴다. 유럽의 여유가 아쉽다. ‘암캐’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DVD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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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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