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처럼 맑고 큰 눈을 한 오드리 헵번을 대뜸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로맨틱 코미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9153)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 내년 5월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극장에서 초연된데 이어 가을에 브로드웨이로 옮겨질 뮤지컬의 제목은 ‘로마의 휴일-코울 포터 뮤지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뮤지컬은 영화 내용에 코울 포터의 음악을 사용한다.
포터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 뮤지컬을 작곡한 브로드웨이의 대명사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트루 러브’(하이 소사이어티), ‘나잇 앤 데이’(게이 디보스), ‘비긴 더 베긴’(주빌리), ‘아이브 갓 유 언더 마이 스킨’(본 투 댄스), ‘인 더 스틸 오브 더 나잇’(로잘리) 및 ‘아이 러브 패리스’(칸-칸) 등이 있다.
명장 윌리엄 와일러(벤-허)가 감독한 ‘로마의 휴일’은 할리웃이 만든 로맨스 영화들 중에서도 으뜸 갈만치 아름답고 정결하고 청순하며 또 미풍과도 같은 감촉을 지닌 흑백명화다. 이 영화로 스튜디오 영화에 첫 주연한 헵번이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주연상(드라마)을 탔고 오스카 의상상과 함께 각본상도 탔다. 그런데 존 디튼과 함께 각본을 쓴 달턴 트럼보(‘스파르타커스’ 각본)는 당시 미국을 휩쓸던 적색분자 색출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야했다.
특히 여성 미용사에 길이 남을 것이 골체미를 지닌 헵번의 짧은 헤어스타일. 이 ‘헵번 헤어스타일’이 삽시간에 전 세계로 유행되면서 한국의 여성들도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었다. 당시 방년 24세의 헵번의 소녀처럼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아름다움 때문에 빛이 나는 작품으로 공연한 그레고리 펙도 말했듯이 “헵번은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되겠다.
처음 와일러가 케리 그랜트에게 로마 주재 미 신문기자 조 역을 맡겼을 때 그랜트가 이를 거절한 것도 영화의 조명이 자기가 아니라 헵번에게 집중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 역은 펙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와일러는 처음에 헵번이 맡은 앤 공주 역을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제의했다고 한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이면서도 끝에 가서 콧등이 시큰해지는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데 사랑하는 공주 앤과 작별을 나누고 돌아서는 평민 조의 착잡하면서도 행복했노라 하는 듯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유럽의 한 소국의 공주 앤이 로마 방문 중 형식과 절차에 시달리다 못해 밤에 혼자 몰래 숙소인 대사관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먹은 진정제로 인해 시내 벤치에서 잠에 빠진 앤을 발견한 사람이 조. 조는 앤의 정체를 발견한 뒤 세계적 특종을 할 욕심에 사진기자 친구 어빙(에디 앨버트)을 불러내 자기와 함께 로마관광에 나선 앤의 일거수일투족을 라이터 카메라로 찍게 한다. 그러나 조는 앤을 사랑하게 되면서 공주의 비밀을 곱게 지켜주기로 한다.
이 영화는 로마 관광영화라고 해도 될 만큼 조와 앤은 시내 관광명소란 명소는 다 찾아다닌다. 먼저 ‘스페인 계단’. 이 계단을 아이스크림을 아이처럼 빨아 먹으면서 걸어 내려오는 헵번(사진)의 모습이 귀엽다. 여기서 만난 두 사람은 트레비 분수를 찾아간다.
영화 ‘애천’과 ‘달콤한 인생’에도 나온 이 분수를 등에 지고 동전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은 로마에는 분수가 곳곳에서 물을 내뿜고 있는데 레스피기는 교향시 3부작에서 ‘로마의 소나무’와 ‘로마의 축제’와 함께 정오의 트레비 분수를 포함해 ‘로마의 분수’를 찬미한바 있다.
이어 조와 앤은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에 있는 커다란 석조얼굴상의 벌린 입 앞에 선다. 이 입은 ‘진실의 입’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입 안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것이다. 일종의 고대 거짓말 탐지기인데 조가 입 안에 넣었던 손이 잘려나간 제스처를 쓰자 이를 보고 질겁한 앤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재미있다. 물론 이것은 조의 속임수인데 이에 앤이 두 손으로 조의 넓은 가슴을 다듬이질 하듯 두드리면서 둘 사이에 사랑의 불길도 달아오른다. 이 장면은 펙의 아이디어이고 헵번의 놀란 반응도 즉흥적인 것이다.
나도 몇 년 전 로마에 갔을 때 이 영화를 따라 조와 앤이 들른 곳을 찾아갔었다. ‘스페인 계단’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앤을 뒤에서 훔쳐보던 조의 흉내도 냈고 트레비 분수에서는 유로동전도 던졌는데 아뿔싸 소원 비는 것을 까먹어 본전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리고 ‘진실의 입’ 안에 손을 넣었으나 손이 지금도 멀쩡한 것을 보면 나는 꽤 진실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멋쟁이 신사배우 펙에게 남다른 선물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가 영화촬영을 위해 로마로 가던 중 파리에 들렀을 때 파리 스와르지의 여기자 도미니크 파사니와 인터뷰를 하고 목적지로 갔다. 그 후 촬영이 끝나고 펙이 다시 파리에 왔을 때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베로니크에게 점심 데이트를 요청하자 장시간 침묵이 이어진 뒤 이를 수락했다고.
펙이 베로니크와 점심을 먹으면서 “왜 그렇게 오래 대답이 없었느냐”고 묻자 베로니크가 “오늘 오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사르트르를 인터뷰하기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더라고 펙은 자신의 기록영화에서 회고했다. 베로니크는 펙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펙이 지난 2003년 87세로 LA에서 타계할 때까지 남편의 곁에 있었다.
*‘주말산책’은 필자의 블로그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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