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권위 있는 영국 영화협회가 144명의 비평가와 감독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오손 웰즈가 25세 때 감독한 ‘시민 케인’(Citizen Kane·1941·사진)이 역대 영화사상 가장 훌륭한 영화로 선정됐다.
할리웃의 기인 웰즈(1915~1985)가 미 역사의 한 괴물인 언론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를 모델로 만든 영화 ‘시민 케인’은 영화가 다변한 언어이며 개인적 예술적 표현의 용솟음치는 분출구라는 것을 힘차게 보여준 기념비적 작품이다.
천재 웰즈가 제작·감독·주연하고 각본을 쓴(허만 J. 맨키위츠와 공동 집필) 이 영화는 웰즈의 대담한 개혁정신과 실험정신이 천둥번개 치듯이 빛과 소리를 내며 창조된 작품으로 영화사상 최고 최대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이 영화는 일면으로는 권력과 부패의 고전적 연구서이자 또 다른 면으로는 뒤틀린 ‘아메리칸 드림’을 기이한 아름다움과 매서운 통찰력으로 묘사한 대담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이 여러모로 실제 인물인 허스트를 그대로 닮아 큰 화제가 됐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외아들 허스트는 절정기에 29개의 신문, 15개의 잡지 그리고 8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했던 언론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면서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물론이요 미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허스트의 신문들은 대부분 선동적이요 감각적인 뉴스 위주의 옐로 페이퍼에 가까웠다.
걸물이자 가차 없는 모리배에 가까웠던 허스트는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인물로 아내를 두고 만난 정부인 영화배우 매리온 데이비스를 스타로 만들려고 코스모폴리탄 픽처스라는 영화사까지 세운 뒤 자신의 언론매체를 총동원해 할리웃에도 강한 입김을 불어 넣었었다.
그는 또 광적으로 전 세계로부터 그림과 조각들을 포함한 예술품들을 수집해 캘리포니아의 중부 도시 샌시메온 산정에 허스트 캐슬이라는 별장을 지었다. 허스트가 ‘황홀한 언덕’이라 부른 이 캐슬은 ‘시민 케인’의 거대하고 음습한 케인의 저택 ‘자나두’의 모델이다.
웰즈가 스크린에 표현한 케인의 개인적 면모나 사생활 그리고 그의 저택까지가 이렇게 허스트의 그것들을 똑 닮자 허스트는 영화 개봉 전과 후에 이 영화를 사장시키려고 자신의 언론매체를 총동원해 맹공격을 해댔었다. 옐로 저널리스트, 실패한 정치인, 혼외정사자인 케인은 누가 봐도 허스트였다. 허스트는 자기 신문에 영화의 광고를 못 내게 하고 필름을 소각시키려고 할리웃의 동지들을 동원해 영화의 원본 필름을 매입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자기 패거리를 시켜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이었던 후버로 하여금 웰즈의 뒷조사를 시키기도 했다.
허스트의 정부 매리온 데이비스가 모델인 케인의 정부 수전(도로시 코밍고어)은 술에 절은 서푼짜리 오페라 가수로 케인의 허영과 야망에 밀려 오페라 무대에 섰다가 비참한 실패를 한다. 허스트가 이 영화를 특별히 증오한 것은 매리온에 대한 이 같은 처참한 묘사에 분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케인이 “로즈버드”를 마지막 말로 남기고 죽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덩지와 재능이 모두 거인급이었던 웰즈를 영원히 영화예술의 제우스로 기억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그는 작품, 감독, 주연상 등 부문에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을 모두 놓쳤다.
‘시민 케인’은 대사와 행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품과 세트와 조명과 음악 및 스크린의 여백과 그림자와 음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과 각도의 창조적 구사를 통해서도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다.
신문기자의 취재형식을 빌어 케인의 생의 전모를 캐어나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위대성은 웰즈의 비상한 연출과 변화무쌍한 연기, 맨키위츠의 실팍하고 뛰어난 각본 그리고 그렉 톨랜드의 딥포커스 기법을 사용한 생생한 촬영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과다한 야망 때문에 파괴된 이 거인에 대한 고전적 비극이 주는 교훈은 성공과 권력과 부가 사랑과 평안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 주고 산 모든 것을 잃고 홀로 죽으면서 케인은 마지막 말로 어렸을 때 자기가 타던 썰매의 이름인 ‘로즈버드’를 토해낸 것이다.
신동이었고 셰익스피어 해석의 대가였던 웰즈는 ‘시민 케인’으로 마치 제왕처럼 뉴욕으로 부터 할리웃에 도착했으나 그의 두 번째 걸작인 ‘위대한 앰버슨 일가’(The Magnificent Ambersons·1942)로 과격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할리웃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방을 당한 뒤 자신의 예술성을 만개시키지 못한 사람이다. 죽기 전 10연년 간은 포도주 광고(선셋 블러버드에 나붙은 광고를 본 기억이 난다)에 나오면서 찬값을 벌던 그는 그릇이 너무 커 할리웃이 받아들이지 못한 비극적 거인이었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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