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전쟁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사진)가 3주 전 캐나다를 포함한 전 북미에서 확대 개봉된 이래 지금까지 연속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1일 현재 총수입은 2억4,890만달러로 이 영화는 작품과 남우주연상 등 총 6개 부문에서 올해 아카데미상(시상식은 2월 22일에 있다)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9.11테러가 일어나자 ‘하느님과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해군특공대(SEAL)에 자원입대해 이라크 전선에서 무려 160여명(공식 집계)의 적을 사살, ‘전설’이라 불린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실화다.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한 장인적 연출과 체중을 늘린 카일 역의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가 좋은 작품으로 재미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 호전성과 함께 살인과 총기를 예찬한 내용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반전주의자인 ‘더티 해리’ 이스트우드의 취향에 딱 맞는 영화다.
영화가 여러 개의 흥행기록을 깨면서 공전의 빅 히트를 하자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이 편을 갈라 영화에 대한 치열한 찬반론을 펼친 것도 바로 이런 영화의 내용 탓이다. 김정은 암살을 다룬 ‘인터뷰’에 나온 세스 로건과 마이클 모어 같은 진보파 영화인들은 영화를 전쟁 찬미라 비판한 반면 새라 페일린과 뉴트 깅그리치 같은 보수파 정치인들은 카일을 영웅이라고 찬양했다.
모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저격수는 영웅이 아니다. 그리고 침략자들이 더 나쁘다”라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비판하자 페일린은 “너 같은 자는 크리스 카일의 군화도 닦을 자격도 없다”고 대응했고 깅그리치도 “마이크 모어는 몇 주간 이슬람국가와 보코하람과 함께 있어 봐야 한다. 그제야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카일은 영웅인가. 유명 방송인 빌 마어는 그를 ‘사이코’라고 지칭했는데 내게는 카일이 전쟁과 살인 중독자로 보인다. 카일은 한 차례 이라크전 복무가 끝나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에 돌아와서도 가정에 적응 못하고 전선의 전우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참전하는데 그에겐 전장이 가정인 셈이다.
나는 카일을 존 웨인이라고 본다. 별명이 ‘듀크’(자기 집 개 이름)였던 웨인은 많은 웨스턴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면서 살육했는데 카일도 이라크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면서 사살했다. 웨인이 인디언들을 살육하면서 그들의 땅을 빼앗은 것이나 카일이 ‘그 곳에는 악이 있어 우리는 그 것을 제거해야 한다’면서 이라크를 침략한 것이나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인가. 슈펭글러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한다.
카일의 옹호론자들은 이라크전을 침략이 아닌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십자군식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MIT 교수인 석학 놈 촘스키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라고 촌평한 촘스키는 최근 파리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후 유럽에서 번진 반무슬림 정서에 대해 “이는 서방의 위선”이라고 평했다.
그는 서방을 겨냥한 공격은 테러로 규정돼 비난 받지만 비슷한 인명피해를 낸 서방에 의한 공격은 비난 받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는 늘 강자가 쓰는 것이어서 사실 서방의 이런 논리는 별로 놀랄 것도 못 된다.
미국 사람들은 영웅과 애국심을 신봉한다. 10여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전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전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미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이야 말로 카일과 같은 영웅이다. 이것이 영화가 빅 히트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또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호전적인 국가다. 1일 열려 무려 1억1,400여만명이 TV로 시청한 수퍼보울의 풋볼경기야 말로 미국인들의 이런 호전성을 잘 보여주는 운동이다. 서로 편을 갈라 치고받으면서 땅을 빼앗고 이를 지키려는 이 경기는 옛날에 서부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의 싸움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말대로 인류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은 우리의 유전인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라는 명목 하에 계속해 해외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스트우드의 말처럼 역사는 평화의 편이 아님에 분명하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카일의 전쟁에 관한 회의와 그와 아내와의 갈등을 비롯한 가정문제 그리고 살인이 인간 영혼과 정신에 미치는 값비싼 대가에 대해서도 언급은 하고 있으나 그것은 킬러영화의 이미지를 무마시키기 위한 양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올해 아카데미 단편 기록영화상 후보작인 ‘위기 핫라인: 재향군인은 1번을 누르세요’(Crisis Hotline: Veterans Press 1)의 관람을 권한다. 뉴욕주 북부에 있는 재향군인 상담센터의 상담원들과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자살과 폭력행위를 생각하는 재향군인들과의 전화상담을 다룬 작품이다. 살육을 구사하는 전쟁이 인간의 내면에 남긴 깊은 상처에 전율하게 되는 작품으로 감정적으로 강펀치를 맞는 느낌이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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