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2일이면 35대 미국 대통령이 암살된 지 꼭 50년이 된다. 그가 텍사스주 달라스시에 도착하여 무개차를 타고 부인 그리고 주지사 등과 함께 연도의 환영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도심지로 이동하다가 리 하비 오스왈드란 암살범의 흉탄에 맞아 46세의 아까운 나이에 희생이 된 5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책들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링컨을 위시하여 암살된 네 명의 대통령 중 하나이지만 JFK에 대한 미 국민의 관심이 특히 오래 지속되어 왔던 이유들은 여럿이다. 우선 그가 매스 미디아 특히 TV와 영상 문화가 한창 발달되었을 때 대통령이 되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미남이랄 수 있는 멋쟁이 대통령과 사교계의 꽃이었던 재클린 여사는 인기 있는 영화배우들이나 마찬가지였었다.
JFK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워낙 첫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가 2차대전 때 전사한 때문에 둘째 아들의 백악관행을 기대하여 엄청난 재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하버드 출신 해군 장교로서의 참전 등 기초가 조금은 있었지만 JFK가 29세의 약관으로 매사추세츠에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케네디가의 재력과 배경 덕이었다. 케네디는 몇 년 후 36세에 매사추세츠 연방 상원으로 당선됨으로써 정계에서 주목을 받다가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그가 아이젠하워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닉슨과의 대결에서 이긴 데에는 TV 토론에서의 좋은 인상이 결정적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닉슨이 저녁 5시경의 턱수염 등 조금은 험하게 보였던 데에다가 TV 스튜디오의 백열등 앞에서 땀이 많이 나와 절절 매는 인상이었던 것과는 달리 케네디는 달변과 침착으로 쿨(cool)하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43세로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기에 2차 대전 참전 세대와 그 아래 젊은 층들이 뉴 프론티어스라는 구호에 열광했었다는 것도 케네디에 대한 좋은 추억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불과 1,000날만 집권했을 뿐이라는 핑계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어 대통령 실적으로 보면 평균이거나 그 이하였다는 게 객관적인 평가일 듯하다. 예를 들면 민권법안이 연방 의회에 제출되기는 했지만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에서 JFK는 흉변을 당했다. 상원 원내총무로 정치 협상에 있어서 남의 추종을 허락지 않았던 린든 존슨 부통령이 케네디를 계승하고 나서야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을 설득해서 민권법(1964년)과 투표권법(1965년)을 연방법으로 만들어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도 존슨 시절의 업적이다.
그런데 가문의 영욕(榮辱)이란 표현이 케네디 가문처럼 적절한 집안도 드물 것이다. 케네디 가문에 대한 여러 책들이 설명하듯이 조셉 케네디의 부 축적과정이 금주(禁酒) 시절의 주류 취급이나 증권 시장에서의 비리 등 떳떳치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연방증권거래위원장과 주영 대사를 지냈다는 경력도 있고 보면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했을 법하다. 특히 노블리스 오블리제(귀족들의 사회적 의무)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철저했던지 JFK의 암살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여 승리가 거의 눈에 보이던 시점에서 암살객의 흉탄으로 LA의 어느 호텔에서 형의 운명을 되풀이 한다. 에드워드 케네디 당시의 매사추세츠 상원의원도 대선의 대망을 품었었다. 그러나 그가 1969년 그의 선거 운동원이었던 젊은 여자와 함께 어느 섬의 밤거리를 달리다가 차가 강물에 빠졌는데도 자기만 빠져나갔고 그 여자는 죽는 사건이 일어나 취중 운전 및 사고 현장을 떠났다는 죄목으로만 유죄를 자인한 사건이 일어나 별별 루머에 휩쓸린다. 그 여자가 임신을 했었을 지도 모른다거나 케네디가 그 여자를 구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의문이 있는 가운데 케네디 가문의 힘으로 덮어졌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는 한 그가 대선에 뛰어들기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1984년인지 대선에 임하려 했던 그가 모 방송국에서 그 사건을 심층 취재하려던 계획을 포착하고는 취소했다는 설마저 있다.
JFK의 아들은 1999년 자기 부인과 경비행기를 몰다가 추락해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빠트렸다. 그의 누나인 캐롤라인 여사는 최근 주일대사로 임명됐고 상원의 인준을 받아 케네디 가문의 공직 봉사는 이어지고 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이유 중 하나는 2008년 예선 초기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캐롤린 케네디의 공개적인 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캐롤린이 자기 삼촌 아저씨가 47년 동안이나 차지했던 상원의원 자리에 출마하고 싶어했고 오바마도 논공행상 차원에서 지원하려 했지만 예선에도 못 나오고 포기했던 것을 보면 카리스마가 부족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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