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이번 주 수요일까지 이어진 민권을 위한 워싱턴 대행진 50주년 기념 행사들은 많은 생각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인종, 종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시민들이 평등과 화평을 누리는 것을 꿈꾼다는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연설이 링컨기념관 앞과 부근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20여만 청중들을 감동시켰던 순간에도 그로부터 50년 후에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바로 그 자리에 서서 킹을 추모하는 장면을 상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민권 행진은 당시의 케네디 행정부 그리고 케네디의 암살 이후의 존슨 행정부로 하여금 민권법(1964)과 투표권법(1965)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거대한 역사의 홍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민권 행진을 하면 킹을 떠올리는 현상은 그를 비폭력 흑인들의 민권운동의 구심점으로 역사가들이 언급하기 때문이지만 그 말고도 오랫동안 2등 국민 대우가 아니라 억울한 억압과 차별을 당해왔던 흑인들의 지위 개선을 위해 노력한 흑인들에 더해 백인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중 두 단체와 그 지도자들만 언급해보면 전국 도시민들의 연맹(National Urban League: NUL)의 휘트니 영과 인종평등위원회(Congress of Racial Equality·CORE)의 제임스 화머를 들 수 있다. 휘트니 영은 미국의 대기업들과 부자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흑인들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다. 링컨 인스티튜트란 자기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흑인학교에서 청소부, 세탁부 등 하급 고용인들이 될 준비만 시키도록 하는 것이 백인 재정지원자들의 요구 조건이었지만 그들 몰래 교사들이나 간호사들을 양성시키는 등의 비밀 교육을 시킨 것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MIT와 미네소타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NUL에서 백인 후원자들을 설복시키는데 수훈갑을 한 영은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그리고 존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올 정도로 탁월했던 지도자였던 모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마샬 플랜으로 복구시킨 것처럼 국내용 마샬 계획을 그가 주창한 것이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정책으로 채택되어 10년 동안에 1,450억불의 연방 기금이 미국 도시들에게 투입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국여행 중 49세로 사망한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대기업들에 흑인들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노력 탓이었다는 평가다.
제임스 화머가 이끌던 CORE는 1961년에 자유승차(Freedom Ride)란 흑인들의 민권신장 운동을 개시했다. 자유승차는 미국 남부의 가혹한 흑백 분리와 차별제도(Jim Crow)에 대한 평화적 도전과 시위운동이었다. 그전에도 몇 번 쓴 적이 있지만 노예해방 이후 남부주들이나 다른 주들 중 여럿은 주법이나 시법으로 유색인종들을 철저히 격리시키고 차별하는 정책과 관습을 고집해 왔었다. 예를 들면 흑백이나 백인과 황인종은 결혼을 할 수 없었고 백인 지역에 유색인종이 집을 살 수도 없었다. 학교, 교회, 식당, 호텔, 극장 등도 엄격히 인종들이 섞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레이 하운드 같은 버스를 타더라도 백인들은 앞좌석 흑인들은 뒷좌석으로 분리되었다. 장거리 여행 중이라 정거장에 쉬는 동안에도 백인 전용 변소, 혹인 전용 변소가 따로 있었고 심지어는 물 마시는 데도 각각이었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에서 1954년에 공립학교의 흑백분리교육이 차별이라고 9대0으로 판결을 내리자 버지니아에서는 ‘대규모적인 저항’이라고 학교문을 다 닫아버린 것과 비슷한 일이 교통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대법원이 공공교통 시설에서 흑백을 분리시키는 것 자체가 차별이니까 위헌이라고 판시한 것도 아랑곳없이 남부 주들은 주법으로 분리차별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도전이 자유승차였다. 흑인 백인 젊은 대학생들이 워싱턴에서 출발하는 그레이 하운드와 트레일 웨이 버스를 동석해서 타고 남행하여 애틀랜타를 거쳐 앨라배마에 진입하고자 한다. KKK단과 주 경찰관들마저 가담하는 백인 폭력단이 정거장에 서있는 버스를 불태우고 흑백 자유 승차자(Freedom Riders)들을 개패듯 한다. 주지사에 대한 케네디 행정부의 압력도 무효였다. 20여명에 가까운 자유 승차자들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다른 자원자들이 버스를 타고 앨라배마로 향하고 주지사는 민병대로 하여금 그 버스 승차자들을 미시시피주 경계선으로 인도하게 한다. 미시시피 주지사는 자유 승차자들을 악명 높은 감옥에 처넣는다. 그래도 계속 자원자들이 버스를 타고 미시시피로 오는 바람에 300여명이 하옥되고 세계 여론이 비등하니까 케네디 행정부는 연방통상위원회로 하여금 버스와 버스 정거장의 분리시설을 철거하도록 한다. 50년 좀 넘는 기간에 미국이 많이 변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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