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명제다. 우디 알렌은 “난 죽음이 무섭지 않다. 다만 내가 거기에 있어야 할 때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며 죽음을 회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필연적인 귀결점이다.
생전 죽음에 집착했던 구스타프 말러(사진)가 거대한 ‘부활’(Resurrection)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 음악을 통해 이 죽음을 초월해 보고자 시도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이 교향곡의 마지막 제5악장을 들으면서 겪는 영혼의 기쁨과 카타르시스는 지상에서 잠시 갖는 재생이요 부활이라고 해도 되겠다.
부활과 재생은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살면서도 영혼의 부활과 재생을 경험할 수 있는데 ‘부활’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까닭도 이 음악이 현실에서 영육이 홍진에 절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경험토록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영혼의 재생과 부활은 원한다. ‘부활’의 80여분은 늘 그런 내게 이것들을 허락한다.
불길하고 어두운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해 금관악기들이 천사들의 나팔소리를 내고 합창이 절규하듯이 무덤을 열면서 죽음에 대한 승리로 끝나는 제2번 ‘부활’교향곡 C단조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종교적이요 철학적인 심오한 고찰이다. 메시지 영화가 있듯이 ‘부활’은 메시지 음악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존재의 중요성을 말하는 실존적 음악이기도 한데 마치 말러가 교류한 니체의 글을 읽는 것처럼 막중한 숙제를 푸는 것과도 같은 음악이다. 후기낭만파 음악과 현대음악의 색채를 함께 지닌 ‘부활’은 영화로 치자면 잠이 와 넓적다리를 꼬집으면서 본 타르코프스키의 작품과도 같은데 그동안 이 음악을 연주회와 CD로 여러 번 들었는데도 들을 때마다 미지다. 오묘한 혼란인데 이 혼란 속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결국 ‘부활’은 이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내 친구 C가 바그너의 ‘링 사이클’을 좋아하는 까닭을 “도전”이라고 말했듯이 내가 어느덧 ‘부활’에 매력을 느끼게 된 까닭도 마찬가지다. 어려워서 좋다면 어폐가 있을지 모르나 ‘부활’은 선험적 경험을 느끼게 해 좋다.
지난 9일 할리웃보울에서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LA 필을 지휘한 ‘부활’을 들으면서 난 처음으로 이 음악에서 바그너의 음색을 감지했다. 중후하고 복잡한 화음 뒤에 이어지는 연약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이 거의 무질서하게 조화를 이루는데 ‘부활’의 제1악장과 제2악장이 특히 그렇다. 틸슨 토마스는 말러를 함축성 있게 표현하긴 했지만 밖에서 듣는 것이 안에서 들었을 때 느꼈던 충격과도 같은 감동을 주지는 못 했다.
‘부활’을 비롯한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 신록이 무성한 자연풍광이다. ‘부활’을 들으면 풀룻과 피콜로가 내는 새소리를 듣게 되는데 자연과 산책을 사랑한 말러가 이 음악을 작곡한 곳이 잘츠부르크 인근의 여름 휴양지인 슈타인바하 암 아터제의 여관 근처 호숫가 오두막이다. ‘부활’은 표현력 유려한 산수화라고도 하겠다.
‘부활’은 또 우수와 슬픔과 고독에 차 있다. 우수는 말러의 휴식처였는데 약골로 생긴 그의 모습을 보면 외로움을 외투처럼 입고 다닌 사람 같다. 이런 우수와 비애와 체념과 절망 그리고 고뇌와 투쟁은 제5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종소리와 합창과 솔로에 의해 구원과 부활과 환희로 모습을 바꾼다.
특히 여기선 말러가 어렸을 때 들은 동네 취주악대의 연주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금관악기들이 일제히 뽐을 내는 소리가 장려하다. “너는 다시 일어나리라, 다시 일어나리라”라는 노래와 함께 하늘 문이 열리면서 앉아서 승천하는 기분이다.
작곡가의 예술혼과 음악의 정서와 구체적 음표들의 절정과도 같은 분출로 “다시 살기 위해 죽는다”는 역설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난 말러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의 금관악기들의 팡파르를 들을 때면 정신이 명징해진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죽고 싶은 것이 내 사치한 바람이다.
6년간의 산고 끝에 나온 ‘부활’은 말러 자신도 만족한 곡이다.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인 내가 이 음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보다는 말러가 한 말이 ‘부활’의 의미를 잘 전한다. “모든 것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들린다. 다시는 이런 깊이와 높이에 다다를 수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까지 뒤져가면서 악상을 찾은 제5악장에 대해선 “대담하고 어마어마하며 또 장엄하다”고 말했다.
난 ‘부활’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의 말러가 ‘삶과 죽음에 대한 근심과 공포를 이렇게 진실하게 표현’(레너드 번스타인의 말)할 수 있었을까 하고 궁금해진다. ‘부활’은 항상 수비상태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침투하고 들어와 우리를 세상의 모든 것으로 부터 해방시켜 준다. 들으면서 겸손해질 뿐이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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