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면접시험 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선생님 한 분의 질문에 “링컨”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그가 노예해방을 선언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나 20대 중반까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노예해방으로 미국에는 인종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겼었다. 1964년에 캘리포니아의 팔로알토로 유학을 오고 나서야 이스트 팔로알토는 백인들이 거의 없다시피 흑인들만의 열악한 구역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때 한창 진행중인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대한 보도로 미국의 인종차별은 노예 해방선언이나 연방헌법 수정 13, 14, 15조로 일거에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있었다.
노예해방 직후에는 흑인 연방상원의원도 한 명, 또 하원의원들도 몇 있었던 것도 잠간이고 흑인들의 참정권이 철저히 합법적(?)으로 박탈되었기에 흑인들은 갖가지 차별과 압박 아래 백인 아이들에게로부터도 “얘, 쟤”로 불리우는 수모 속에 살아온 것이 1960년 중반까지였다. 특히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등 남부 여러 주들에서 흑인들의 질곡(桎梏)의 역사는 참혹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1965년에 연방 투표권법이 통과되기 전 남부와 일부 서부 주들이 어떻게 유색인종들의 투표권을 제한하려 했던지 살펴보자.
주의회들에서 통과된 법으로 아주 복잡한 투표권자 등록제도를 확립해 놓은 것이 제1단계다. 남부 제주의 등록제도와 등록담당관은 인종차별과 탄압 시스템의 주요 고리였다. 또 백인 일색인 주정부, 군 정부 관리들 및 경찰관들도 투표권자로 등록하려는 흑인들을 탄압하고 방해하기 일쑤였다. 방해와 탄압을 무릅쓰고 등록처에 등록을 하러 오는 흑인들이 간혹 있다면 갖가지 죄목으로 체포를 해서 방해하는가 하면 가족들까지 괴롭히는데야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는 포기하는 게 당연지사였다.
남부에서 또 흑인들을 억압하는데는 백인 시민연맹들이 주요한 몫을 담당했다. 백인 비즈니스들, 고용주들, 은행들과 임대주들이 똘똘 뭉쳐 흑인들이 감히 투표권자로 등록하려 하면 보복을 일삼았다. 직장에서 쫓아내고 세집에서 내쫓기며 혹시 오두막집이라도 모기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차압이 들어오는 데야 소위 당할 장비가 있을 수 없다.
경제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등록을 하려는 자들의 명단이나 신상은 백인 테러단체인 쿠 쿨럭스 클랜(KKK)에게 넘겨지곤 했었다. 흑인들의 집 앞에 십자가 모양의 불지르기는 약과이고 잔인한 구타와 성폭행과 살해까지 뒤따랐다. 대다수의 백인들은 KKK를 남부 전통의 수호자로 칭찬했다. 많은 정치인들도 KKK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휴고 블랙이라는 앨라배마주 출신 미 연방대법원 판사도 젊었을 때는 KKK 단원이었지만 참회를 했던지 가장 진보적인 판사로 명성을 누렸다.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 연방상원의원으로 50여년 활동했던 로버트 버드도 비슷한 경험을 거쳤다.
앨라배마주의 경우만 보자면 군의 법원 청사에 위치한 투표권 등록처는 두 주일에 한 번만 열렸다. 법원 청사 부근에는 보안관들이나 다른 백인들이 서성대며 등록하러 오는 흑인들에게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 게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일단 신청서를 받아들면 첫 요건은 이미 투표권자로 등록된 사람 하나를 보증인으로 세우라는 것인데 흑인들에게는 하늘의 별을 따라는 것처럼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리고는 투표할 자격이 있는지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에 통과해야 되는 절차가 있었다. 등록관이 미 연방 헌법 중 어려운 내용만을 골라서 물어보는 데는 하버드 법대 출신이라도 붙기 어려워 흑인들은 번번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간신히 붙었다 하더라도 투표세를 내야 했었다.
1964년에 통과된 연방 헌법 수정 제 24조가 투표세를 금지시킨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1965년에는 연방 투표권법이 통과되어 존슨 대통령의 법 서명식에는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참석했다. 그 법의 중요한 집행 수단으로는 역사적으로 흑인들의 참정권을 방해했던 주들이나 군들이 만약 선거법이나 정책을 변경하려고 한다면 미 법무성이나 연방 법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연방의회는 2006년에 그 법을 25년 더 연장했는데 상원에서는 97대0, 그리고 하원에서도 390대 33으로 통과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주 화요일 연방 대법원에서는 흑인 대통령만 아니라 앨라배마주 셀마나 몽고메리의 시장들조차 흑인들인 현 상황에서 선거법 개정에 대한 그같은 사전 승인은 타당하지 않다고 판시하여 대통령과 법무장관, 그리고 주요 언론기관의 비난을 받았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아들 부시), 안토닌 스칼리아(레이건), 앤소니 케네디(레이건), 클라렌스 토마스(아버지 부시), 새뮤얼 얼리토(아들 부시) 등 5명이 다수 의견을 냈고 루스 긴스버그(클린턴), 스티븐 브라이어(클린턴), 소냐 소토마이어(오바마)와 엘레나 케이건(오바마)이 신랄한 소수의견을 피력했다. 투표권법의 주요 집행수단은 사장될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