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간다고 해서 달라질게 뭐 있느냐는 듯이 토요일 밤 프렌치쿼터는 여전히 음악과 술과 춤 그리고 인파와 소음의 탁류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휴지 애스 비어즈’라고 쓴 선전판을 든 사람 앞으로 큰 십자가를 든 사람이 지나간다.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를 기마경관은 무심히 지켜보고 있다. 나도 맥주병을 한 손에 들고 기마경관을 카메라에 담았다.
4명의 마술사들이 로빈 후드처럼 부패한 거부들의 돈을 훔쳐 관객들에게 뿌리는 스릴러 ‘나우 유 시 미’의 프레스 정킷 차 지난 주말 뉴올리언스에 다녀왔다.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것은 지난 1987년 11월. 당시 파리 특파원이던 김승웅 선배와 나는 각기 한국일보에 유럽과 미국으로 나누어 ‘세계 영화기행’을 연재했었다. 뉴올리언스는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현장이다.
공항에 내리니 뉴올리언스의 특산물인 습기가 날 대뜸 포옹한다. 위대한 미시시피강이 도시를 끌어안은 모양이 초승달 같아 ‘크레센트시티’라 불리는 뉴올리언스는 재즈와 습기와 프랑스풍 거리와 집이 있는 프렌치쿼터의 도시. 관광객이 많고 흥청망청 놀아대 ‘파티타운’이요 ‘빅 이지’라고도 부른다.
길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랜치(비비안 리)가 엘리지안 필즈로 타고 갔던 디자이어 스트릿 행 전차와 똑같은 빨간 전차들이 여전히 “땡땡 땡땡”하고 종을 울리며 달리고 있다. 지난 50년대 내가 서울서 타고 학교에 가던 전차와 닮았다.
도시의 냄새와 공기와 떡갈나무와 건축양식 그리고 색깔과 분위기가 이국적이요 고전처럼 아득하니 멀어 현장에 있는데도 그립다. 그런데 도시에서 알게 모르게 가난의 호흡기가 느껴진다.
공항 대합실에서도 호텔 화장실에서도 그리고 식당과 술집에서도 재즈가 흘러나온다. 프렌치쿼터의 버본 스트릿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밴드들도 신나게 재즈를 연주하는데 모두들 루이 암스트롱이 되고 싶은 것이려니.
프렌치쿼터 바로 곁의 커낼 스트릿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고 어둠이 내려앉자 나와 내 키다리 스웨덴 친구 마그너스는 생선요리로 공복을 채운 뒤 술 이름 생각나는 버본 스트릿을 따라 프렌치쿼터로 들어갔다. LA의 생선요리는 저리가라다. 브렌다 리가 부른 ‘워킹 투 뉴올리언스’를 콧노래로 흥얼대면서 흐느적 흐느적 걸으며 밤의 광란과 아우성을 겪는 흥분이 죄를 지어도 좋을 만큼 타락적이다.
둘이서 바 하핑을 하는데 인산인해를 이룬 술집에서는 락과 컨트리와 재즈와 자이데코가 범람한다. 혈액 채취용과 닮은 플래스크에 담은 ‘샷’을 사 마실까 하다가 그만뒀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술집과 호텔 발코니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이 밑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구슬 목걸이를 마구 내던진다. 나도 하나 받아 목에 걸었다. 보통 때도 이렇게 요란한데 마디 그라 땐 오죽할까.
한 집 건너 술집이요 스트립 조인트요 오이스터 바인데 저만치 내가 4반세기 전에 사진을 찍은 ‘디자이어’ 오이스터 바가 보인다. 내 단골 술집처럼 반갑다. 그런데 노란 색깔의 바 이름에서 남은 글자는 달랑 ‘RE’ 두 개뿐이다(사진). ‘DESI’는 어딜 갔을까. 밀물 치던 욕망이 배짱을 부리다 지쳐 썰물로 빠져 나가다 ‘RE’를 놓고 간 것일까. 욕망의 정체를 보는 것 같아 빠진 이빨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느낌이다.
‘잠발라야’ ‘검보’ ‘바이유’ ‘크랩피시’ 및 ‘자이데코’ 등 LA에선 보기 드문 글자들이 알록달록 네온 빛을 내는 프렌치쿼터는 밤이 깊을수록 ‘니나노 딴따라 동네’ 티를 더해가며 갈 짓자 걸음이다. 쾌락과 방탕과 취기가 가히 디오니소스적이어서 속인인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내게 음식을 서비스 하던 호텔 웨이트리스의 “사람들은 그저 여기 왔다가 이 도시에 반하게 되지요”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튿날 아침에 혼자 도도한 흙탕물 강 미시시피를 찾아 갔다. 강이 심지가 굳고 강건하다. 옛날에 탐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뗏목을 타고 놀던 강 위의 페리가 내지르는 고동소리가 처량하다.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잠깐 대전에서 선생을 할 때 산 역 인근 하숙방에서 듣던 대전 발 0시50분 열차의 기적소리처럼 들렸다.
미시시피를 돌아본 뒤 다시 마그너스와 함께 이번에는 프렌치쿼터의 로열 스트릿으로 들어갔다. 낮은 밤 같진 않았지만 역시 거리와 술집과 식당의 밴드들은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의 도시다. 여행서 막 돌아와 보니 우리가 바로 몇 시간 전에 걸은 프렌치멘 스트릿 인근에서 마더스데이 퍼레이드에 누군가 총질을 해 19명이 부상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섬뜩했다. 뉴올리언스가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험악한 도시라는 FBI 조사가 틀린 말이 아니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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