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동포사회가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를 중심으로 구 대한제국 공관의 구매 회수 운동을 벌였으나 소유주 젠킨스의 값 올리기에 발목이 잡혀 진전을 보지 못하던 중 문화재청이 문화유산 국민 신탁을 동원해 치밀한 구매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102년만인 2012년 8월 29일 국치일에 보란 듯이 되찾았으니 참으로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다음 과제로는 이 공관 건물이 어디까지나 그 역사성에 가치가 있는 만큼 어떻게 내부를 복원 조성 전시하여 이 건물에 깃든 역사적 교훈을 재생산 활용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공관 건물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 건물에 얽힌 역사적 배경과 연혁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인 것이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의 충격과 파급효과
1880년 온건개화파의 거두인 김홍집은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살피기 위해 제 2차 수신사로 도쿄에 가 당시 청나라 주일 공사관 참찬관으로 주재하던 외교관 황쭌셴 (黃遵憲)을 만나 그가 집필한 외교 지침서인 「조선책략」을 얻어다 고종 황제에게 바친다. 이로 인해 고종황제와 민비를 비롯한 조야는 대원군의 쇄국에서 벗어나 개화정국을 주도하며 어둡기만 하던 외세에 눈을 뜨고 특히 자주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에 미국의 외교 국력을 이용할 생각을 갖게 한다. 「조선책략」의 요지는 방대하고 막강한 아라사(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조선이 친중국(親中國·중국과 친하며), 결일본(結日本·일본과 손잡고), 연미국(聯美國·미국과 연합하여) 3국 공조를 이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략의 진실은 조선을 위주로 했다기 보다는 아라사의 팽창을 저지해야 할 자기네 청나라의 외교국방에 조선을 동원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아야 하지만 우리보다 한발 앞서 세계 열강의 역학관계에 탁월한 외교안목을 갖추고 있었던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황쭌셴은 미국은 강대하고 정의롭고 공정하여 10여 년 청과의 교류에서 청을 괴롭힌 일이 없는 신뢰할 만한 나라라는 귀중한 논평을 기술하여 대한제국의 대미외교를 결정적으로 촉성하는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여파로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888년 박정양을 초대 전권공사로 하여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상재, 이하영, 번역관 이채연을 인솔하고 워싱턴에 임대공관을 마련하여 역사적인 대미외교를 시작한다.
이번에 회수한 대한제국공관은 공관 개설 3년 후인 1891년 11월 고종황제가 대미 자주외교력만이 국권 회복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탁월한 판단으로 국고 재원이 부족하여 궁중 사생활비 내탕금 2만 5천불이라는 엄청난 자금을 지불하여 건축 14년 차의 아름다운 빅토리아 풍의 건물을 구입함으로써 토지 대장에는 건물 수매자가 대한제국이 아닌 현 조선국왕 (Present King of Chosen Ye) 개인 소유로 등재 되었는바 고종 황제의 국권 수호 열망을 말해 주고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성립과 해악
청일전쟁에 이어 1905년 노일전쟁마저 승리한 일본의 군사력에 불안을 느낀 제 26대 대통령 테어도어 루스벨트는 육군 장관 William Taft를 도쿄에 보내어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일본이 미국이 점유하고 있는 필리핀에 불가침을 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우월권을 인정한다는 비밀 합의를 7월 27일에 하고 29일에 각서 형태의 메모랜덤을 작성한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후 계속된 고종황제의 국권회복 노력을 보면, 1904년 고종의 폐위 운동에 연루되어 5년 8개월간 한성 감옥에서 복역하고 나온 이승만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케 하였으나 실제 면담은 해를 넘긴 1905년 8월 4일에야 이루어져 루스벨트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추인한 직후가 되어 실패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고종황제는 다시 황실 고문 헐버트(Hulbert)를 미국에 보내어 을사조약의 총칼에 의한 강압불법성을 호소케 하였으나 같은 이유로 실패하게 된다.
이 밀약의 성립으로 거칠 것이 없게 된 일본은 이토를 조선 통감으로 파견하여 무력에 의한 강압으로 서둘러 조선을 병탄하고 고종황제의 외교 노력을 무력화 시키는 엄청난 해독을 끼쳤지만 이 밀약이 조약과 같은 공식 문서로 협정된 것이 아니고 메모 형태의 양해각서로 작성되어 루스벨트의 개인 문집에 극비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1924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Dennet Tyler 교수가 발견하여 비로소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2년 뒤인 1907년 고종황제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을 헤이그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파하여 국제사회에 을사보호 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케 하였으나 주최국 네델란드의 입장 불허로 마지막 노력마저 실패한 채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의 그릇된 밀약으로 비록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고종황제의 자주 외교를 통한 국권 회복 운동은 끈질기게 반복되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1897년 10월, 수천년 중국 예속으로부터의 주권 독립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설립과 황제 즉위를 연계해 보면 비록 막강한 외세의 횡포에 막혀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고종황제의 일관된 주권독립과 자주외교 추구는 올바른 선택으로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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