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진갑 다 지나고 나니 종종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무섭다. 서울서 잠시 S대를 다닐 때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사람들은 왜 신을 믿기를 두려워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신앙도 죽음처럼 우리가 전연 알지를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프레스 정킷차 뉴욕에 갔다 오는 길에 보니 한 보험회사의 빌보드 광고에 ‘오늘 태어난 아이들 셋 중 하나는 100세까지 산다’고 쓰여 있다. 난 이 광고를 보면서 ‘야, 바야흐로 구약시대가 재도래 하는 구나’라면서 피식 웃었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어서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난 요즘 대학교 때 내 친구 C가 준 조지 기싱의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개인일지’를 읽으면서 이런 부질없는 바람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기싱은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한 뒤 자기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중단은 결코 자기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종말과 함께 영원한 평화가 오니 그것이 늦게 오든 빨리 오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죽음을 수용할 자세를 보여주었다.
기싱의 이런 생각은 마침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컨트리 싱어 송라이터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사진)의 최신 앨범 ‘죽음을 느끼며’(Feeling Mortal)에서도 솔직하고 통찰력 있게 표현되고 있다. 나이 76세가 된 그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지나온 삶을 감사하며 아울러 겸손하게 죽음을 맞겠다는 노래들 10편으로 된 앨범인데 듣는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는 앨범 제목인 첫 곡에서 “활짝 깨어 죽음을 느끼네/오늘은 여기에 있으나 내일은 가버리네/그것은 사필귀정이지/내 눈이 닿는 끝까지 공허한 푸른 수평선과 함께”라고 노래한다. 그는 이어 “나는 조만간 떠나지만 어쨌든 나는 승자다”며 청소부와 박서와 가수로서 철저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찬양하고 있다.
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드럼과 바이얼린을 극도로 절제해 쓰면서 감상성을 배제하고 마치 염하듯이 부르는 노래가 문학적이요 속이 깊다. 다 갈라진 허스키한 음성으로 마치 술에 취한 듯 편안하게 노래하는데 전체적으로 감사와 수용의 뜻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노래에서 주(Lord)를 찬양하고 있다.
크리스토퍼슨은 ‘표류자’에서는 “매일 나는 벼랑 끝 가까이로 가고 있지/깊고 넓은 대양의 물 위의 작은 점 하나일 뿐/나는 가라앉아도 물결 하나 이루지 않으리”라며 닥아 오는 죽음에로의 접근을 고백한다.
일절 가식 없는 야생적이요 천연 그대로의 음성이어서 호소력이 강하다. 컨트리 웨스턴 팬인 나는 ‘헬프 미 메이크 잇 드루 더 나잇’과 ‘포 더 굿 타임스’ 같은 히트송을 부른 크리스토퍼슨의 노래를 평소에도 즐기는데 이번에 그의 고백록인 앨범을 들으면서 그의 가득한 심중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나 나나 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도 모른다.
앨범에 두 번째 곡으로 실린 ‘마마 스튜어트’는 영탄조의 노래로 크리스토퍼슨은 94세난 마마 스튜어트를 통해 다시 한 번 주를 찬양하면서 “마마 스튜어트가 보는 세상의 아름다운 내면을 나도 보게 해 주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다.
현재 하와이에 살고 있는 크리스토퍼슨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죽음을 느끼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놀랍다”며 “70대에 아침에 일어나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느끼게 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난 나이 먹은 배우들을 인터뷰 할 때면 종종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프랭크 란젤라(75)는 “나는 죽음이 무섭다”고 해서 “나도 동감”이라고 말했다. 제레미 아이언스(64)는 “죽음은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끔 해주어 필요한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그런데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평생을 질병의 고통과 투쟁 속에 살았던 베토벤도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리니 언제든 좋을 때 오너라. 나는 너를 용감하게 맞으리라”고 말했지만 막상 임종 때에는 주먹을 쥔 오른 팔을 올리면서 그것에 저항했다.
또 술 때문에 39세로 요절한 웨일즈의 시인 딜란 토머스도 그의 시 ‘그 좋은 밤으로 부드럽게 들어가지 마세요’에서 “켜켜이 쌓인 나이는 날이 끝날 때 불타오르고 노호해야 하는 것”이라며 죽음에 항거했다.
그런데 죽음을 아무 때나 오라고 하던 기싱도 우리를 마지막에 보잘 것 없이 만드는 질병이라는 고통은 두려워했다. 나는 때가 오면 말러의 ‘부활’ 교향곡 속에 고뇌와 회의와 슬픔을 비롯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오래 못 본 친구처럼 맞고 싶다. 자다가 죽었으면 딱 좋겠는데 그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이것도 욕심인가.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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