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에서 잠시 가톨릭계 대학을 다닐 때 신부로부터 요리문답을 배운 적이 있다. 어느 날 신부는 우리에게 “왜 사람들이 신을 믿기를 두려워하는 줄 아는가”라고 묻더니 “그 까닭은 믿음이 죽음처럼 전연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자답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은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용기라면 신앙이란 용기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공연 중인 단막극 ‘엑소시스트’(The Exorcist·사진)에서 메린 신부가 “믿음은 용기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같은 뜻에서 한 말일 것이다.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쓴 소설 ‘엑소시스트’는 지난 1973년 윌리엄 프리드킨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뒤 미 문화의 하나의 사건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10대 소녀 레이건(린다 블레어)이 오래된 악령에 씌워 머리가 180도로 회전하고 입에서 온갖 상소리와 함께 시퍼런 이물질들을 토해내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고 졸도를 하는가 하면 극장 밖으로 달아나는 바람에 큰 화제가 됐었다. 영화가 세계적으로 빅 히트한 것은 물론이다. 나도 이 영화를 서울의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봤는데 공포감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엑소시스트’하면 흔히들 공포물로만 여기고 있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다분히 종교적이요 철학적인 작품이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막 모친상을 당한 뒤 자신의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를 하고 있는 젊은 신부 데미안(데이빗 윌슨 반스-영화에서는 제이슨 밀러)을 통해 묻고 있다. 데미안은 자신의 이 같은 영적 위기와 신앙에 대한 회의를 악마에 씌운 레이건(에밀리 예터)에 대한 구원을 시도하면서 풀어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엑소시스트’는 이렇게 신앙의 위기를 맞은 사람이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선과 악에 대한 물음이 대두된다. 이와 함께 종교적 차원을 넘어 존재의 위기까지 탐색한 일종의 실존철학 극이기도 하다.
무대는 가운데 테이블 위에 누운 레이건이 입은 흰 잠옷과 시트를 제외하곤 전부 검은 색의 단출한 세트로 꾸며졌다. 무대 주위는 검은 철제 교회 문으로 둘러싸여졌고 공중에 대형 십자가가 매달려 강한 종교극 분위기를 낸다. 모두 9명의 출연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마귀에 사로잡힌 레이건이 성체를 씹어 뱉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영화처럼 노골적으로 괴기하고 무서운 장면들이 연출되지 않고 음향효과와 심리적 긴장감으로 공포감을 조성한다. 처음에 레이건이 선 채로 오줌을 누고 삼촌 버크에게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장면이 같은 장면을 보면서 불길한 느낌을 갖게 했던 영화를 생각나게 만든다.
연극은 또 다른 믿음에 대한 회의를 다룬 ‘신의 아그네스’를 쓴 존 필마이어가 극본을 썼는데 악마의 문제를 단순히 종교적인 면으로만 다루지 않고 인간 내면에 잠복한 악마성을 들춰내 도덕극으로 만들었다.
악령 추방의식을 행하는 메린 신부(리처드 체임벌린-영화에서는 맥스 본 시도)는 작품 해설자 역할도 하는데 그는 처음에 관객을 향해 “악마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세 단어가 있다. 아우슈비츠. 캄보디아. 소말리아”라고 말한다. 현대적 색채가 가미된 정치적 사회적 발언인데 그의 “정치가들도 악마”라는 대사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레이건의 어머니로 영화배우인 크리스(브룩 쉴즈-영화에서는 엘렌 버스틴)와 그녀의 오빠로 과거 신부가 되려고 생각했던 영화감독 버크(해리 그로너) 간의 신랄한 대사도 믿음과 회의에 관한 것인데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린 버크의 종교에 대한 회의가 자못 사악할 정도로 냉소적이다. 이와 함께 데미안과 음향효과를 사용한 악마 간에도 종교적이요 철학적인 대화가 오가는데 다분히 설교조이다.
작품은 어둡고 회의적이요 갈등으로 가득 차 있지만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데미안의 희생은 인간의 악마성을 치유하는 희망으로 이를 신앙이라고 봐도 되겠다.
존 도일이 연출한 검소한 작품에서 인상에 남는 것은 챈트 같은 음악과 23세의 예터의 명료한 연기. 체임벌린 등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무난하나 쉴즈는 목석같다. 영화를 본 뒤 갖고 있는 선입견적 느낌을 버리고 관람하기를 권하는데 특히 기독교 신자들에게 권한다. 게펜 플레이하우스(10886 Le Conte Ave.) 8월12일까지. (310)208-5454.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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