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시작된 지 올해로 50년째가 된다. 지난 1962년 007시리즈 제1편 ‘닥터 노’가 개봉된 이래 이 시리즈는 오는 11월9일에 개봉되는 샘 멘데스 감독의 ‘스카이폴’에 이르기까지 무려 23편이나 만들어지면서 영화사상 최장 시리즈의 기록을 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시리즈 제2편 ‘007 위기일발’이 ‘닥터 노’보다 먼저 개봉됐었다. 나는 이 영화를 대학생 때 종로 3가에 있는 피카딜리 극장에서 봤는데 어떻게나 재미가 있었던지 아이들 과외공부 가르쳐 번 돈으로 비싼 입장료를 내고 세 번이나 봤다.
위험 앞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짤막한 한 줄짜리 냉소적인 유머를 내뱉을 줄 아는 쿨한 멋쟁이 본드로 나온 션 코너리의 야수적 매력이 약골인 나를 압도하면서 나는 그를 거의 영웅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본드가 술꾼이요 플레이보이라는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
본드와 유사점이 있는 케네디가 좋아해 그 인기에 열기를 더 한 본드영화는 많은 신조어와 유행을 만들어냈다. 하나 같이 팔등신 미녀들인 본드 걸과 애스턴 마틴으로 등장한 본드 카 그리고 보드카 마티니와 새빌로우에서 만든 턱시도.
이와 함께 실루엣이 천천히 유영하는 감각적인 오프닝 타이틀신과 이 때 나오는 강렬하고 박력 있는 주제음악도 본드 영화의 특색이다. 이 음악은 ‘007 위기일발’ ‘골드핑거’ 및 ‘선더볼 작전’ 등 시리즈 여러 편의 음악을 만든 존 배리가 작곡한 것이다.
그러나 본드 시리즈에서 본드에 버금 갈 정도로 멋있는 인물은 본드를 괴롭히다 결국은 황천으로 가는 ‘본드 악인들’(Bond Villains)
이다. 본드는 아마도 이들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술꾼 플레이보이 스파이에 지나지 못했을 것이다.
본드 악인들은 대부분 남자인데 제23편인 ‘스카이폴’에 이르기까지 3명의 여자 악인들이 나온다. 본드의 최초의 여자 적수는 ‘007 위기일발’에 나오는 살인파괴 용역단체 스펙터의 아주머니 킬러 로사 클렙(로테 레냐)이다. 로사는 구두 앞꿈치에서 튀어나오는 독침으로 사람을 잡는데 본드도 이 때문에 혼이 난다.
나머지 두 여자 악인은 소피 마르소(‘월드 이즈 낫 이너프’)와 로사문드 파이크(‘다이 어나더 데이’)로 둘은 고약한 레냐에 비하면 말캉한 섹스 인형들 같다.
한국계 릭 윤도 본드 악인으로 나왔다. 그는 ‘다이 어나더 데이’에서 남침을 시도하는 북한군 대령(역시 한국계인 윌 윤 리)의 하수인으로 나왔다가 본드에 의해 비명횡사한다.
본드의 악인들은 냉혈동물 같은 킬러에서부터 거의 어릿광대처럼 그려진 인물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대부분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자들로 때로는 그냥 자기 이고와 힘자랑 겸 철없는 아이들처럼 재미삼아 나쁜 짓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본드와 그의 악인은 유사한 데가 적지 않다. 둘 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형이자 고독자들로 킬러 본능을 즐기고 또 늘 그들의 옆에는 늘씬한 미녀들이 있다. 본드는 말하자면 늘 어두운 또 다른 자신과 싸우는 셈이다.
본드의 적 가운데에서 가장 신비한 자가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이다. 그는 ‘007 위기일발’에서부터 ‘포 유어 아이즈 온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5편에서 스펙터의 보스로 나오는데 ‘007 위기일발’과 ‘선더볼 작전’에서는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는 손과 얼굴을 뺀 상반신과 음성만 나와 악마성을 더욱 강하게 풍긴다.
블로펠드는 다른 시리즈들인 ‘유 온리 리브 트와이스’와 ‘여왕 폐하의 007’ 및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에서는 각기 도널드 플레전스와 텔리 사발라스 그리고 찰스 그레이에 의해 표현된다.
본드 악인들로 카리스마와 사악한 멋을 갖춘 자들로는 냉소적인 황금광 골드핑거(게르트 프뢰베)와 ‘리브 앤 렛 다이’에서 황소 눈과 거구에 저음으로 사람 겁주는 흑인 미스터 빅(야펫 코토) 그리고 본드만이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의 적이라고 간주하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의 프란시스코 스카라만가(드라큘라 역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리) 및 제6대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가 나온 ‘카시노 로얄’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르 쉬프르(매즈 미켈슨)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공포와 매력을 함께 느낀 가장 사악한 본드 악인은 ‘007 위기일발’에서 스펙터의 킬러로 나오는 레드 그랜트(로버트 쇼·사진)다. 그랜트는 금발에 준마처럼 탄탄한 체구를 지닌 찬피동물의 결정체로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마치 파리 잡듯 살인을 한다. 그가 달리는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객실 안에서 본드와 격투를 벌이다 본드의 단도에 찔려 죽었을 때 난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었다.
‘스카이폴’에서 본드의 악인으로 나오는 하비엘 바르뎀(그는 이미 ‘노 컨트리 포 올드 멘’에서의 킬러 역으로 오스카 조연상을 탔다)과 대니얼 크레이그의 대결이 기다려진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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