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경복 중학교 합격생 발표가 있던 날은 눈이 왔다. 교문 위에 붙인 하얀 한지에 검은 붓글씨로 쓰인 내 한자 이름을 보고 미소를 짓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중학교 3년 그리고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정든 교정을 나선지가 어느덧 올해로 50년이 되었다.
북악을 등지고 솟아난 나의 모교는 경관이 아름답고 아늑했다. 꾀꼬리 동산에서는 여름이면 매미들이 죽는다고 울어댔는데 러닝셔츠 바람으로 푸른 수목들 속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헤세의 골트문트가 부럽지 않았다.
미국 국가와 드보르작의 ‘고잉 홈’을 배운 것도 그리고 카뮈의 ‘이방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것도 모두 중학생 때였다. 또 ‘셰인’과 ‘지상에서 영원으로’와 ‘베라크루스’를 본 것도 다 중학생 때였다.
그 때는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매우 성숙했었다. 6.25사변을 거치고 초근목피를 못 면하던 때로 우리가 ‘스포일드 브랫’(spoiled brat-버릇없는 애새끼)이 되기에는 사회 환경이 엄격하고 혹독했다. 빨리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세상에서 동심을 끌어안고 살던 고뇌하던 성장기였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보다 주로 명동에 있던 지하 음악감상실 ‘돌체’로 개근하다시피 했다. 닐 세다카의 ‘오, 캐롤’과 폴 앵카의 ‘다이애나’를 들은 것도 여기서였다. 그의 신세가 내 것처럼 느껴졌던 이상과 ‘초인’의 탄생을 위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이체를 탐독한 것도 이 때였다. 영화에 미쳐 살던 내가 조선호텔 앞의 경남극장에서 앨란 래드 주연의 웨스턴 ‘대혈산’을 보다가 단속반에 걸려 2주 정학을 받은 것도 고등학생 때였다.
난 꼬마였던 데다가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많지 않았고 6.25의 직격탄을 맞은 이산가족으로 홀어머니가 고생해 학교를 보내 공부를 비롯해 대학과 사회 전체에 대해 거부감이 강했었다. 난 학교 중퇴까지 생각 했었다. 그런 내가 ‘죄와 벌’에 매료됐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고등학생 때 자연 책(교과서 말고)과 영화와 음악(주로 팝)에 매어달려 혼자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와 팝송 때문에 나는 은연중에 미국을 동경하게 되었고 결국 영화기자가 되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고등학생 때 여고생들과 데이트도 했지만 늘 단편으로 끝났다.
중학생 때 같은 반하며 친했던 아이가 지금은 한국의 대표적 작가인 황석영이다. 그 땐 이름이 수영이었던 석영이는 공부시간에도 노트에 펜으로 소설을 썼다. 고등학교 2학년 때 4.19가 났는데 학교가 경무대(현 청와대) 가까이에 있어 데모하는 대학생들의 함성과 이를 막는 경찰들의 총소리가 교실에까지 들려왔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담력 있는 급우들은 “우리도 나가야겠습니다”라며 말리는 선생님에게 항의를 했지만 선생님들이 교문 앞에서 인간 사슬을 치고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때 만약 급우들이 밖으로 나갔더라면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와 덕수국민학교 동창인 글재주가 있던 안종길이 귀가 중 유탄을 맞고 숨졌다.
이런 추억이 가득한 경복의 동기들 중 서울과 타주에서 온 몇 명을 며칠 전 5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지난 10일 열린 ‘재미 남가주 경복교 37회 졸업 5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였다.(사진) 목에 건 명패를 보고서야 누군지 알았지 이젠 잿빛 머리에 주름이 진 얼굴만 보고선 누가 누가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세월의 가차 없는 진행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허탈감을 느꼈다.
서울에서 동기회장 진형섭(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 왔고 뉴저지에서 나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고등학교 때 ‘난폭자’의 말론 브랜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걸물 김승길, 시애틀서 이경훈(징그럽게 공부를 잘해 전체 탑)이와 장득용, 포틀랜드에서 서재웅, DC에서 박수영이와 이규양, 버지니아에서 진영선이 그리고 토론토에서 이영현이 참석했다.
반세기 만에 처음 보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너 누구야”라며 서로들 신원조회를 하더니 곧 이어 “야 자 임마”를 연발하며 서로들 끌어안고 옛 정을 되새겼다. 모두들 순진하고 순수한 장난꾸러기 아이들 같았다. 우리는 포도주와 스카치를 마셔가며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과거의 은근한 치마폭 속에 숨어 있던 추억들을 찾아내 구슬치기 하듯 즐겼다.
커닝하던 얘기, 싸우다가 얻어맞고 피 흘리던 얘기, 정학 당한 얘기 그리고 기동차 타고 뚝섬으로 놀러가던 얘기와 서부영화 보면서 박수치던 얘기를 나누면서 박장대소를 하며 과거로 돌아갔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어렵고 힘든 것까지 모든 것이 다 즐거웠다.
우리는 모두 일어서 손을 잡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조용필의 ‘친구여’를 합창하면서 오는 5월에 서울에서 열리는 졸업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만나기로 다짐하고 헤어졌다. 눈물이 났다. 서울에 가면 창덕이와 종국이 그리고 호일이와 충우와 양호도 만나겠지. 석영이도 꼭 와라. 우리 만나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청춘을 얘기하자.
<박흥진 편집위원> /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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