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1962년과 63년에 개봉된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 제1편 ‘닥터 노’와 제2편 ‘007/위기일발’이 빅히트를 하자 냉전의 기운이 한창이던 60년대 미국에서는 스파이 영화 붐이 일면서 본드 영화를 본 따거나 풍자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본드 영화의 냉소적인 독성을 뺀 유머를 곁들인 가벼운 터치로 만들어졌다. 이런 영화들 중 대표적인 것이 딘 마틴이 나온 스파이 액션 코미디 ‘맷 헬름’ 시리즈와 제임스 코번이 나온 ‘플린트’ 시리즈다.
‘맷 헬름’ 시리즈에서 마틴은 은퇴했다가 현역으로 복귀한 스파이 헬름으로 나오는데 시리즈 제1편 ‘사일렌서’(The Silencers)가 히트를 하면서 속편이 무려 3편이나 나왔다. 나도 이 영화를 서울서 봤는데 내용이나 전체적 톤이 너무 가벼워 스파이 영화 보는 스릴이나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플린트’ 시리즈 역시 마틴의 영화와 같은 가벼운 코믹터치의 스파이물
로 ‘아우어 맨 플린트’와 ‘인 라이크 플린트’ 등 2편이 나왔다. 나는 영화를 대한극장에서 봤는데 늘씬하게 큰 키에 단단한 체구를 한 코번의 날렵한 액션과 수영복 차림의 팔등신 미녀들이 눈요깃거리는 됐지만 역시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타작이다. 그리고 지난 1997년에 제1편이 나온 마이크 마이어스 주연의 ‘오스틴 파워즈’ 시리즈도 007 영화를 사사건건 베껴 먹은 풍자영화다.
60년대 나와 인기를 모았던 첩보물 TV 시리즈들로는 흑백 스파이 2인조 빌 코스비와 로버트 컬프가 나온 ‘아이 스파이’(I Spy) 와 단 애담스가 실수 연발의 스파이 맥스웰 스마트로 나온 ‘겟 스마트’(Get Smart) 그리고 탐 크루즈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진 ‘미션 임파서블’ 등이 있다.
이런 스파이 TV 시리즈 중에 시청자들의 엄청난 인기를 얻어 TV판을 확대한 영화를 무려 8편이나 제작, 개봉해 빅히트한 것이 ‘맨 프롬 U.N.C.L.E.’(The Man from U.N.C.L.E.·사진)이다. NBC-TV가 1964~68년 방영한 이 시리즈는 국제적 스파이들로 구성된 첩보기구 U.N.C.L.E.(‘법과 집행을 위한 연합 네트웍 사령부’의 머리글자)에 소속된 미국 스파이 나폴레옹 솔로(로버트 본)와 소련 스파이 일리아 쿠리아킨(데이빗 매컬럼)의 활약을 그린 것인데 완전히 본드 시리즈를 모방하고 있다.
본드 시리즈가 어른들을 위한 첩보물이라면 ‘솔로’ 시리즈는 아이들 장난처럼 가볍고 경쾌하고 코믹한데 나는 시리즈 중 하나인 ‘내 얼굴을 한 스파이’(The Spy with My Face)를 단성사에서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나폴레옹 솔로라는 이름과 본드 역의 션 코너리를 닮은 본의 세련된 젠틀맨 모습 그리고 노랑머리의 똑똑 소리가 나게 야무지게 생긴 매컬럼의 앳된 얼굴과 그와 본의 콤비. 또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 스파이가 한 팀이 돼 세계를 말아먹으려는 악인들을 처치한다는 내용도 흥미 거리.
그런데 ‘맨’이라는 시리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리즈는 원래 솔로 단독 주인공으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시리즈 첫 에피소드 ‘벌칸 어페어’에 잠깐 나온 쿠리아킨에 반한 시청자들의 열화 같은 요구로 다음 에피소드부터 그를 솔로의 파트너로 격상시켰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확대한 영화 ‘스파이 함정에 넣기’(To Trap a Spy)를 보면 매컬럼은 단역으로 나온다.
솔로와 쿠리아킨의 뉴욕 본부는 위장한 델 플로리아 양복점으로 둘의 보스는 영국인 웨이벌리(리오 G. 캐롤-히치콕 영화의 단골). 웨이벌리는 본드의 상관 M이요 솔로의 적 스러시(THRUSH)는 본드의 원수 스펙터(SPECTRE)이며 웨이벌리의 비서이자 교환은 M의 비서 모니페니라고 하겠는데 이 밖에도 솔로가 플레이보이라는 사실과 솔로가 쓰는 펜라디오와 단추폭탄 같은 소도구를 비롯해 메인타이틀 전의 액션 시퀀스와 제리 골드스미스의 박력 있는 주제 음악 등 철저히 본드 영화를 모방했다. 본드 소설을 쓴 이안 플레밍이 TV 시리즈 창작에 기여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영화 내용은 솔로와 쿠리아킨이 전 세계를 돌며 적을 무찌르나 막상 화면을 보면 그 동네가 그 동네다. 전부 현 소니사가 있는 LA 인근 컬버시티의 왕년의 MGM 스튜디오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주인공은 솔로와 쿠리아킨 둘이어서 나머지 인물들은 초청 배우들을 쓴 것도 재미있다. 8편의 영화를 보면 캐롤 린리, 줄리 런던, 베라 마일스, 잭 팰랜스, 텔리 사발라스, 센타 버거, 립 톤, 재넷 리, 쿠르트 유르겐스, 질 아일랜드, 조운 크로포드, 엘리노어 파커 및 레슬리 닐슨 등 왕년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나온다.
본드 시리즈 ‘골드핑거’를 본 딴 ‘카라데 킬러스’(The Karate Killers)에는 도산의 아들 필립 안이 절에서 도 닦는 전직 과학자로 단역으로 나오는데 웬 까닭인지 크레딧조차 없다. 8편의 영화를 담은 DVD 셋이 최근에 나왔는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이 시리즈를 리메이크할 계획이라고 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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