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한국에 갑자기 일본 소설들이 번역 출간되면서 일본 문학 붐이 일었던 때가 있었다. 나도 소설책을 대여해 주는 동네 책가게에서 ‘빙점’과 ‘가정교사’ 및 반전 대하걸작 ‘인간의 조건’ 등을 빌려다 탐독했었다.
이 때 내가 호기심과 함께 아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이시하라 신타로가 쓴 ‘태양의 계절’이다. 현 도쿄 도지사인 이시하라는 반한주의자요 일본군의 난징 양민 대학살을 허구라고 망언을 하는 쇼비니스트다.
‘태양의 계절’은 그가 23세 때 출판돼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권위 있는 아쿠다가와상을 받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소설에 나오는 방향감각을 잃은 전후 젊은 세대를 ‘타이요조쿠’(태양족)라고 부른다.
‘태양족’은 미군이 점령한 패전 일본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로 나태하고 비도덕적이며 폭력과 무절제한 섹스를 즐기면서 까닭 모를 분노와 좌절감에 시달리는 잃어버린 세대들이다. 목표의식과 삶의 좌표를 잃은 실의에 빠진 반 영웅들로 일본판 ‘이유 없는 반항’의 주인공들이다.
‘태양의 계절’은 부잣집 아들로 학교 권투선수인 대학생과 그의 애인과의 관계를 통해 전후 일본 젊은이들의 폭력과 섹스와 자기 파괴 및 내적 혼돈을 힘차고 사납고 거칠며 또 뜨겁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사춘기였던나는 책의 적나라한 내용과 충동적인 주인공의 행동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순식간에 읽어 치운 뒤 이시하라의 다른 소설을 몇 편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태양족’의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 ‘태양족’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코레요시 쿠라하라 감독의 ‘뒤틀린 청춘’(The Warped Ones·1960·사진)에 나오는 복날 더위에 미친개처럼 길길이 날뛰는 아키라(타미오 카와치)다.
이 영화는 일본영화 뉴웨이브의 전위역할을 한 작품인데 재즈광인 좀도둑 아키라가 교도소에서 나온 뒤 자기를 고발한 기자의 젊은 애인에게 앙갚음을 한다는 내용이다. 난스탑 에너지와 여름의 열기(원제 ‘열기의 계절’이 더 잘 어울린다)로 화끈하게 달아오른 이 영화에서 볼만한 것은 영화 내내 온갖 인상을 써가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타미오의 숨 가쁜 연기와 경탄을 금치 못할 촬영이다.
요동치는 카메라가 뛰듯이 걷는 아키라를 따라 다니면서 급작스레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위로 인물과 사물과 태양을 포착하는데 퀵컷과 롱샷 그리고 클로스업과 프리즈 프레임과 함께 백열과 암흑을 효과적으로 사용, 보는 사람을 화면 속으로 확 잡아챈다.
프랑스영화 뉴웨이브의 기수 장-뤽 고다르가 감독하고 장-폴 벨몽도가 주연한 ‘브레스리스’(1959)를 그대로 닮았다. 코레요시가 고다르의 영화를 훔쳐다 쓴 것이나 아닐까 할 만큼 카메라 테크닉이 비슷한데 타미오 카와치는 일본판 장-폴 벨몽도라고 해도 되겠다.
코레요시가 역시 타미오를 써 만든 ‘검은 태양’(Black Sun·1964)도 ‘태양족’ 영화라고 하겠다. 재즈광인 젊은 날건달 메이와 살인을 하고 도주한 흑인 G.I.라는 걸맞지 않는 한 쌍의 도주와 적대감과 우정을 코믹하면서도 묵시록적인 안목으로 그렸는데 ‘뒤틀린 청춘’처럼 재즈와 바다가 작품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동서양의 문화충돌과 인종차별을 우스꽝스럽게 까발긴 영화이기도한데 역시 촬영이 현기증이 나도록 어지럽다. 아찔하게 충격적이요 또 아름다운 것은 경찰에 쫓기던 G.I.가 건물 옥상에 있는 광고용 대형풍선의 줄에 감겨 막 떠오른 태양을 향해 떠가는 라스트신. 대단히 재주 있는 감독이구나 하고 혀를 차게 된다.
코레요시 감독의 비등하는 에너지가 숨이 차도록 헉헉대며 주인공을 몰아대는 ‘나는 증오한다 그러나 사랑한다’(I Hate but Love·1962)도 속도감 있는 서술과 분주한 촬영이 좋은 작품이다. 자기 삶에 회의를 느낀 유명 방송인이 도쿄에서 큐슈까지 낡은 지프를 전달하기 위해 몰고 가는 로드 무비인데 남자의 뒤를 그의 애인이자 매니저가 재규어를 타고 쫓아오면서 로맨틱 코미디가 엮어진다. 라스트 신이 뜨겁다.
코레요시가 ‘뒤틀린 청춘’과 같은 해인 1960년에 만든 소품 ‘협박’(Intimidation)은 일본 최초의 필름 느와르라고 불리는 범죄물. 자기 정부의 핌프로부터 협박 받는 은행 간부와 그의 소심한 친구인 만년 말단 행원 간의 관계를 그린 드라마인데 마지막 플롯의 반전이 기막히다.
육체가 감전된 듯 짜릿짜릿 해지도록 에로틱하고 여름 오수처럼 나른하니 예술적인 ‘사랑의 갈망’(Thirst for Love·1967)을 보면 코레요시가 다양한 장르의 감독임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유키오 미시마의 소설이 원작으로 시아버지와 관계를 갖는 젊고 아름답고 육감적인 부잣집 미망인과 여인이 탐을 내는 젊은 집안 일꾼 간의 얄궂은 삼각관계를 그린 욕정과 섹스에 관한 심리 드라마다. 정적과도 같이 고요한 촬영이 아주 곱다.
이들 영화 5편이 이클립스(Eclipse)에 의해 ‘코레요시 쿠라하라의 뒤틀린 세상’(The Warped World of Koreyoshi Kurahara)으로 나왔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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