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역시나’이다. 꽃잎이 활짝 피는 절정의 시기가 너무도 짧다. 겨우 일주일 정도 핀 꽃을 보려고 볼품없고 지친 듯한 흑 자줏빛 잎을 달고 있는 모습을 일년내내 보고 살아온 것이다. 매년 12월이 되면 겨울철은 어김없이 알아보았다. 잎을 다 떨어뜨려 앙상한 가지로 서있었다.
그러다 꽃망울이 맺히고 곧이어 꽃잎이 만개할 즈음에 꼭 바람을 동반한 비를 못 이기고 미처 다 피지 못한 연약한 잎을 순식간에 다 흩날려 버리는 것이다. 자줏빛으로 돋는 새순의 아름다움도 잠깐이다.
분분한 연분홍빛 벚꽃의 화려한 모습을 즐기려고 10여년 전에 조그만 일본벚꽃(Japanese Cherry Blossom) 묘목을 앞마당 왼편 창을 살짝 가리도록 심었다. 곧고 균형 있게 자라도록 버팀목으로 꼭꼭 붙드는 정성을 수년 동안 기울였다. 화사한 분홍 꽃잎 커튼으로 삼분의 일쯤 가려진 앞 창문으로 봄이 오는 세상을 맞이할 만큼 알맞게 자랐지 싶었다.
근래 매년 이른 봄이 오면 기다리고 기다린 시간, 드디어 풍성하게 핀 꽃을 즐겨야지 하며 기대를 잔뜩 품게 된다. 그런데 꼭 비가 와서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절감하게 한다. 아쉽다. 이젠 매년 다가올 봄에 크게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며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많은 계획을 세워 보았지만 대부분 계획대로 그렇게 척척 아귀가 맞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자연 떠올려진다. 속절없이 지는 벚꽃이 나를 재촉한다. 하고 싶은 일, 해야 될 일들은 다가올 어느 시간에 할 것이라고 계획을 세우지만 어쩌면 그 때는 사정이 달라져서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꼭 하고 싶은 일, 해야 될 일은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해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벚꽃나무를 통하여 확인한다.
미루지 말고 해야 될 일을 꼽아본다. 먼 곳, 가까운 곳 등 세상 구경이 제일 하고 싶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산으로, 들로, 이곳, 저곳을 다녀 생소한 것들을 접하게 되면 새로운 세상에 사는 듯, 사는 일이 더욱 흥미로워질 것 같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그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3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일본의 최고 목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무척 좋아한다. 3만점을 그리려면 대략 하루에 한 장은 그려왔다는 셈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린 것이다. 화려한 화폭과 대담한 구도의 시원스런 그의 그림도 좋아하지만, 90평생 살면서 93번의 이사를 한 점을 특히 존중한다. ‘붉은 후지산’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등 그의 작품도 나를 압도하지만 93번을 이사할 수 있는 부지런하며 적극적이며 생동하는 그의 마인드가 더욱 존경스럽다.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느라 집을 무척 지저분하게 사용하여 더러움을 피하려고 93번의 이사를 했다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면 새로운 동선과 낯선 풍경 속에서 솟아나는 창의성과 지적 자극이 있기에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93번의 이사는 못할지라도 틈나는 대로 여기저기 가까운 곳, 먼 곳, 산으로, 바다로, 박물관으로, 식물원으로, 공원으로 돌아다니고 싶다. 솜씨가 없어서 그림으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공감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보고 즐기고는 싶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보면서 세상을 배우는 것이다. 보면서 차이를 느끼고 평범과 비범의 미묘한 격차를 깨닫는 것이다. 맛을 많이 보아야만 그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듯 보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흔히 보는 만큼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가. 보는 것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관찰력이 섬세해질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이 기쁜지 외로운지 힘든지를 빨리 알아보아 적절한 대처를 한다면 인간관계에도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미련없이 아낌없이 단번에 속절없이 저버린 벚꽃을 바라볼 때 허망한 마음도 들지만 왠지 조급한 마음이 든다. 나를 용서하는 일, 남을 용서하는 일은 미루지 말 것이며, 시대에 맞지 않는 구습과 쓸모없는 감정들도 벚꽃이 지듯 여지없이 날려버리고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지고 일상이 식상하게 느껴지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볼 일이다. 가까운 식물원이나 공원에서 산보를 하면서 자연과 접하면 삶의 활력과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남을 느끼리라. 벚꽃이 지는 시간에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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