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이 먼 사람을 가리켜 봉사라 한다. 따라서 마음의 눈이 먼 사람은 당연히 심(心) 봉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인 삶을 사회생활이라고 한다면 마음으로 사는 삶은 영적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사회생활에도 눈이 보이지 않으면 불편함이 따르는데 영적 생활은 오죽 하겠는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마음의 눈을 뜨고 사는 수밖에 없다. 마음의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심청이로 사는 것이다. 심청이의 어머니는 심청이가 태어나면서 죽었기 때문에 심 봉사가 동냥젖으로 키운 아이였다. 이렇게 큰 심청이가 장성하여 일을 나간 사이, 걸식 스님 심봉사를 찾아와서 하는 말, ‘두 눈 멀쩡히 뜨고 살 사람이 봉사로 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에 심 봉사, 귀가 번쩍 뜨여 그 자리에서 걸식 중에게 공양미 삼 백석을 드리겠다고 덜컥 약속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애써 키운 딸 심청이 마저 빼앗기기에 이른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누구든지 마음의 눈이 먼 채로 살아가면 이런 걸식 중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사냥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영혼의 사냥꾼들은 예수의 말처럼 소경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먹잇감을 챌 때는 독수리눈처럼 밝아진다.
서문표라는 사람의 고사(古事)가 생각난다. 서문표는 공자의 학파 중 직하(直下) 학파 출신으로 공자의 제자였던 자하의 제자인데, 그가 업이라는 땅의 관찰사로 임명을 받고 부임을 했을 때의 일이다. 부임을 해보니 마을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그 마을의 촌로를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촌로의 대답인 즉, 황하에 살고 있는 물귀신이 매년 부인을 얻는다는 하백취부(河伯取婦) 때문이라고 했다. 마을의 만신 무당과 그와 결탁한 삼로라는 마을 수장이 주관하여 매년 마을 주민에게 수 만 냥의 거금을 갹출해서 동네 처녀 중 하나를 골라 황하에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딸을 둔 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당연히 마을 분위기가 침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문표가 그 촌로에게 ‘다음 번 하백취부(河伯取婦)가 열리는 때 꼭 나를 부르라’고 당부하여 보냈다.
드디어 하백취부(河伯取婦)가 있는 날, 황하 강변에 마을 주민들과 제자 무당 열 명을 데리고 서 있는 만신 무당, 그리고 주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삼로와 아전들이 기세등등해 있었다. 드디어 무당의 굿이 시작되고 하백(河伯)의 부인으로 간택된 처녀가 막 황하에 던져지려는 찰나, 서문표가 입을 열었다. “그 처녀를 내가 한번 봐야 되겠으니 이리 데려 오너라” 그리고 그 처녀를 보고 나서 하는 말, “이 처녀는 하백(河伯)의 부인 감으로는 너무 못 생겼구나. 다시 골라야 되겠다.” 그러면서 만신 무당에게 “네가 귀신하고 가장 잘 통하니 네가 하백(河伯)에게 가서 내가 앞으로 삼일 후에 아주 어여쁜 처녀를 신부로 보내겠다고 알리고 오너라” 하면서 그 무당을 번쩍 들어 강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한 동안 강가에서 서성거리더니 하는 말, “하백(河伯)에게 기별을 하러 갔던 만신 무당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 그리고는 그 뒤에 있던 만신의 제자 무당 중 한 사람을 가리키며, “네 스승이 꾸물거리는데 이번에는 네가 들어가야 되겠다” 하고는 그 제자 무당을 황하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연달아 제자 무당 세 명을 강에 던져 버렸다. 그런데 무당이 네 명씩이나 들어갔는데도 감감무소식이라. 그래서는 종교와 결탁하여 치부하는 세력의 가장 수장인 삼로를 가리켜, “아무래도 하백(河伯)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그러니 이제 네가 가 봐라” 하고 삼로를 황하에 던져버렸다.
이 고사(古事)가 말하는 것은 그 어떤 종교든 신도들에게 헌금이나 시주를 강요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사이비 집단이요 인간 영혼의 사냥꾼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날도 하백취부(河伯取婦)를 빙자하여 인간 영혼을 사냥하는 영혼의 사냥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의 눈을 뜨고 사는 것이다. 공자처럼, 서문표처럼, 예수처럼 마음의 눈을 활짝 뜨고 사는 길밖에 없다. 심청(心淸)이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다. 예수는 말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심청이))는 하나님을 본다.” 마음의 눈을 떠라! 심 봉사로 살지 말고 심청이로 살라! 그러면 그대는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하나님을 보게 되리라!
신민철 /목사, 게인스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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