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은 필자가 대학생 시절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친구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한국서는 문과계통의 공부를 했는데 이곳서는 도저히 영어 때문에 문과공부는 하기 어려워서 공과로 전공을 바꾸었다고 했다. 사실 필자는 한국서 대학 생활을 못해 본 게 한이었는데 그는 반대로 필자처럼 몇 년이라도 더 일찍 미국에 온 학생들을 부러워했다. 대학 입학 전에 영어 공부를 더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겠느냐면서 말이다. K군은 집안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을 하면서 대학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집에서 더 이상 쓰지 않는다며 새 것과 다름 없는 큰 사이즈의 카펫을 필자의 기숙사 방에서 사용하라고 가져다 줄 정도로 인정이 많은 친구였다.
K군의 옛 여자 친구 얘기가 생각난다. 그는 한국서 미국에 오기 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관계를 정리하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옛날 여자 친구 얘기를 자주하는 것을 보니 마음 속으로 정리가 안 된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말로는 자기 옛 여자 친구만큼 예쁜 여자를 어디서 또 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마침 79년 여름에 한국에 나가야 할 일이 있어, 옛 여자 친구를 만나 아직도 애틋한 그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가 한사코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아 그냥 그 여자 친구가 다닌다는 대학의 과사무실로 무턱대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남학생들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여자대학이라 교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학교로 들어가시는 어느 교수님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가장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과사무실에서 그 여학생의 전화번호를 받아 만나볼 수 있었다. 친구 말 그대로 미모였다. 그 여학생은 필자가 전화 했을 때 사실 K군이 귀국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말인 즉, 필자가 아닌 K군을 직접 만날 것으로 기대했다는 뜻이었다. 결국 K군과 그 여학생은 인연이 아니었다.
그 후로 그는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을 마치고 버클리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졸업 후 미국의 큰 기업체에서 몇 년간 일하다가 이 회사가 한국에 새로 시장개척을 위해 진출할 때 한국행을 자원했고, 결국은 한국 내에서의 사업 책임자 자리를 거쳐 극동지역의 총책임자로까지 승진하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필자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0년도 전 일이다. 그가 워싱턴 지역에 거주하는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필자에게 연락을 했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그때까지 달려온 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애들 교육을 위해 자신에게 보람되고 적절한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이지만 정리하고 미국의 본사로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K군에 대한 생각을 잊고 있다가,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필자의 다른 친구들에게 우연히 그와의 옛 추억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 아침에 느닷없는 이메일 한통이 필자에게 날아왔다. 그의 부인으로부터였다. 필자가 10년여 전에 K군을 이곳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한 이 부인의 이메일에는 K군의 부음 소식이 담겨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겨우 53세의 나이에 돌보아 주어야 할 가족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소에 전혀 조짐이 없던 뇌출혈로 말이다. 올해 들어 규모가 큰 한국 자회사의 사장으로 취임까지 하면서 큰 포부를 갖고 열심히 일하던 그의 죽음은 필자로 하여금 인생의 연약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에게 많은 미안함도 느꼈다. 그는 평소에 부인에게 필자 얘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이 필자에게 부음 소식을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K군이 필자를 생각했던 것만큼 그를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에 필자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집사람이 필자의 소식을 알려주는 대상에 그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 K군에 대한 이 갑작스러운 소식은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뿐만 아니라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필자의 교우관계를 돌아보는 기회도 되었다. 오랜 친구가 마지막 가는 길에 무심했던 친구에게 챙겨준 배려 깊은 선물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변호사
훼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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