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오전은/ 먹을 갈며 보낸다./ 새삼스럽게 모필연습(毛筆演習)을 하자는 것도 만지장서(滿紙長書)를 쓰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먹을 갈아보는 것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목월의 시를 읽어보는 아침이다. 아무 잡념도 떠올리지 않고 목월의 시를 음미하며 먹을 갈아본다. 세월을 보내는 아쉬움을 누르며 한 획을 그어보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먹을 가는 시간. 글씨야 아직 멀었어도 먹이야 못갈까. 정성들여 가는 묵향의 그윽함이 코끝에 스며들고 조용히 스스로를 돌이키는 침잠의 시간이다. 추사(秋史) 선생의 글씨를 속인이야 어디 흉내라도 내겠는가.
“고봉에서 떨어지는 돌과 같고 창공에 떠 있는 초생 달 같고 천리의 구름 같고 만년 묵은 마른 등나무 같고 몇 만 근의 활촉이 나아가는 것 같고,” 이는 당나라 구양순의 팔법 서론인즉 언필칭 이러한 서체를 자유로이 구사한 추사의 글씨는 지금도 우리를 자못 놀라게 하지만 우리야 이에 미칠 엄두를 낼 형편도 아니다. 다만 추사의 먼 끝에 앉아 먹이나 갈아보자는 얘기다. 학문적 바탕이 없이 이름이나 내세우려는 글씨나 남의 것만 모방하려 드는 그런 서예에 눈 뜨지 말고 그저 벼루에서 배어오는 먹의 냄새를 맡아가며 스스로의 좌우명이라도 일필휘지하는 여유를 가져보자.
서예의 원리는 상대적이라고 한다. 정(正)이면 반(反)이고 곡(曲)이면 직(直)이며 평(平)이면 측(側)이듯이 그렇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우리 먹을 갈며 그러한 글씨의 원리를 터득하는 슬기를 배우자. 그래서 붓과 종이와 쓰는 이의 합심을 느끼며 마음과 몸의 힘이 붓끝에 모아지는 진지한 순간을 터득함이 어떠한가. 명품 서체로 만든 병풍 한 틀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추사의 서찰 한 장에 기백만 원을 운위한다 할지라도 우리 같은 범인들이 그런 물욕의 발상으로 먹을 갈아서는 안 될 일이다.
옛부터 붓 벼루 먹 종이를 문방사우(文房四友)로 꼽았다. 물론 문사들의 서재에는 이 사우 외에도 여러 가지 이용물들이 있었다. 책상 서가(書架) 문갑 필통 필모(筆帽) 필세(筆洗), 먹을 얹어놓는 상, 종이를 눌러놓는 서진(書鎭), 이뿐이 아니다. 사방탁자 화병 현판 족자 액자 병풍 고비(考備), 수반(水盤)과 괴석 등이 그들의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문방사우는 볼펜과 종이로 줄어들었고 그마저 컴퓨터의 마우스에게 그 자리를 선위하였다. 어쩌다 돌아다니는 붓이 있어도 그 용도는 먼지 낀 구석을 털어 내거나 고장 난 기계의 부속품을 점검하는데 사용되고 벼루 역시 뒤뚱거리는 책상의 한쪽 다리를 고이는 역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 조차 미국에 오면서 훌훌 내던졌다가 이제야 아쉬운 마음으로 지인을 통해 몇 가지 구비하여 먹을 가니 만감이 교차하는 아침이다.
옛날에는 이름 있는 벼루 하나 가지는 것을 큰 긍지로 여겼다. 이를테면 중국 광동 고요현(高要縣)에 있는 단계연(端溪硯)을 최상으로 꼽았으며 그것을 본떠 복건 호남 운남의 단계연과 우리나라 평북 위원의 연석도 이들과 어깨를 겨루었다. 지금도 충남 보령군 남포의 오석연(烏石硯), 화초문석연(花艸紋石硯)은 그 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붓 역시 마찬가지다. 갖가지 털로 만든 것을 수집하는 게 자랑 중의 자랑이었다. 이리털, 토끼털, 범털, 사슴털, 쥐 턱수염털, 노루털, 돼지털, 삵괭이털, 족제비털, 그러나 이제는 컴퓨터에 들어가면 듣도 보도 못한 서체에 채색까지 자유자재니 붓 걱정은 그야말로 공연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기야 투수가 던지는 스트라이크 속도보다 더 빠른 세월을 살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지필묵연(紙筆墨硯)을 찾는다는 것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존과 생활 그 두 가지를 다 소중하게 가꾸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생활의 여유란 날카로운 금속성이나 현란한 프로그램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쉴 사이 없이 이어지는 워드 프로세스의 연속성에 금을 그어야한다. 기능주의의 논리에 결박된 우리의 손을 풀고 지난 세월에 담겨진 이야기를 서툴게나마 써보지 않겠는가.
먹을 가는 시간.
침묵으로 장식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도 말고 스스로의 짐이 얼마만큼 무거운가를 생각지도 말며 다만 내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뜨거운 사랑의 언어를 기억하면서 그렇게 먹을 가는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저 유명한 송연먹(宋烟墨)이나 유연먹(油烟墨)은 없어도 좋다. 황해도 해주와 평안도 양덕의 향기 높은 먹도 찾지 말자. 그저 조용히 먹을 갈자. 묵향이란 먹을 갈아야만 맡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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