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아마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늘엔 은하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초롱초롱한 별들은 실바람에도 쏟아질 것만 같은 한여름 밤이었다. 필자는 집 앞에 있던 아름드리 키 큰 소나무에 기대어 한참 꿈을 꾸고 있었다. 마을은 모두 잠들어 고요했다. 간혹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의 고요를 깨트리곤 했다.
그때, 집으로 들어오다 대문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흙담 울타리에 박꽃이 활짝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박꽃으로 휘장을 한 우리 집은 달빛에 조명을 받아 유려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박꽃은 매일 밤, 그 자리에 피어 있었을 텐데, 그것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고 예뻤다. 박꽃은 왜 하필, 모두 잠든 밤에 홀로 피었을까? 자기만의 사유나 철학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사춘기 소녀에게 던져진 엄청난 화두였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감상적인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찬 서리 내리고, 해가 바뀌면서 이내 박꽃을 잊어버렸다. 대신, 채찍에 휘둘린 말처럼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숨이 차도록 달렸다. 중년이라는 숨 가쁜 언덕바지에 올라 숨 고르기를 할 때, 내 기억 속을 헤집고 삐죽이 내미는 것이 있었다. 소나무에 기대어 꿈을 꾸던 소녀와 말갛게 웃던 박꽃이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온 후, 나는 박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때 보았던 그 박꽃은 무의식세계로 옮겨와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나의 삶 속에 뿌리내려, 생활 전반에 영향력을 미쳤던 것 같다.
하얀 옷을 즐겨 입었던 것도 그렇고, 하얀 꽃을 유달리 좋아했던 것도 그렇다. 하얀 백합, 하얀 국화, 하얀 칼라, 하얀 찔레꽃, 그리고 하얀 눈꽃까지도 무척 좋아했다. 하얀 꽃만 보면 그저 좋아서 무턱대고 사다 심어 놓아 우리 집 정원에도 하얀 꽃 일색이다. 요즈음은 하얀 다알리아가 한창이다. 거름이 좋은지 정원을 다 차지할 정도로 몸집은 무성한데 꽃을 제대로 피우지 않아 밑동을 잘라버렸다. 그랬더니 잘린 밑동에서 옆 가지들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 저렇게 많은 꽃을 피운 것이다. 꽃나무도 상처 입은 녀석이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가 싶다. 지금도 하얀색을 좋아하는 연유는 바로 그 ‘기다림’의 꽃말을 지닌 하얀 박꽃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하얀 도화지나 새 노트에 대한 감정이 유별나다.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기 위해 새 노트를 펼치는 순간, 설렘으로 가득 찬다. 그것은 하얀 종이 위에 내가 그리고 싶은 밑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밤새 내린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듯, 백지 위에 첫 세계를 연다는 것은 가슴 떨림이다. 그러나 가끔 그 순백 위로 아픈 상처가 드러날까 두렵고, 용기가 없어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이 밑그림을 망칠까 덜컥 겁이 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진실은 미치도록 쓰고 싶은 것이다. 아마 이민생활에서 오는 외로움인지도 모른다. 말이 고프고, 모태 언어가 그리워서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속에 있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다. 그중에 젖은 이야기는 햇볕에 말리고, 따뜻한 이야기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다.
하잘것 없는 이야기라도 소신껏 그려보자.
흠집 없는 빨간 단풍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가끔은 비바람에 찢기고 벌레 먹은 낙엽이 더 애잔하고 아름다울 때가 있지 않은가? 장미만 지조 높은 꽃인가. 부끄러워 밤에 숨어 피는 박꽃도 독특한 개성이 있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을 것이다.
결 고운 빼어난 글이 아니면 어떠냐, 보리밥 같은 소박한 글이 때로는 소외감으로 잠 못 이루는 누군가에게 벗이 되어 줄 것이다.
제비가 착한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주어 금은보화가 쏟아지게 하는 그런 재주는 없어도 좋다. 손에 손잡고 작은 힘이라도 한데 모아 함께 담벼락을 오를 수 있는 박꽃 넝쿨 닮은 겸손한 글이면 좋겠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그저 목마른 자에게 시원한 물 한 바가지 흠뻑 퍼다 줄 수 있는 박 바가지 같은 수수한 글이면 되겠다. 살아 내느라 힘겨운 내 이민동지들에게 위안이 되고 고향 같은 푸근함을 줄 수 있다면, 지금도 어디선가 울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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