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났다!”
그 말이 참 재미있다고 느낄 틈도 없이, 연이어 “개천에서 용이 나면, 좀 괴롭죠?” S 소설가의 말에 그만 웃음보가 터져 한입 물고 있던 커피를 후욱 뿜고 말았다.
내가 웃음보를 터뜨린 것은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니라, ‘개천에서 난 용과 함께 사는 사람은 괴로울 것’이라는 이면의 숨겨진 감정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애환이나 풍진 세상을 전혀 이해할 것 같지 않은 S 소설가의 세련된 도회지의 이미지도 선입견으로 한 몫 작용했을 것이다.
‘개천의 용’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쓴, 이청준 ‘눈길’에 나오는 작중화자를 일컬음이다. 자본주의가 팽창한 요즈음은 돈 없으면 개천에서 용 나기도 어렵지만, 이 소설이 쓰였던, 배곯았던 그 시절에는 개천에서 용도 자주 났던 것 같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핀다는 진리를 교훈 삼아 각고의 노력으로 성공한 사례들도 많다.
필자는 1980년 후반에 미국에 왔다. 그때, 용이 되기 전의 ‘새끼 용’들을 많이 보았다. 그 ‘새끼 용’들 뒤에는 항상 어머니라는 훌륭한 배후 인물이 있었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 보양식으로 미꾸라지를 삶아 으깬 다음 꽁꽁 얼려서 항공편으로 부치는 어머니도 있었다.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운 어떤 어머니는 미국만 가면 잘사는 줄 알고, 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아들에게 돈을 부쳐 주지 않는다고 성화이신 어머니도 있었다.
공부가 끝나 갈 무렵이면,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빚진 자와 빚진 일이 없는 자’로 분류가 된다.
‘빚진 자’는 부모의 재산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가세가 기운 부모님과 형제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
‘빚진 일이 없는 자’라고 여기는 쪽은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다. 속칭,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매우 떳떳하다. 필자도 구분하자면, 용은 못되나 후자 쪽에 속한다.
지금까지도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는 기억은 어느 한 노모와 된장 속에 든 구더기 이야기다. 한국에서 K 어머니가 비닐봉지로 겹겹이 싸서 보내 주신 된장이었는데, K 아내가 그 소포를 풀자 구더기가 비닐봉지에 하얗게 붙어 있었다. 젊은 새댁은 새파랗게 질렸다. 서울에서만 살아 시골 사정을 잘 모르는 그녀는 큰 허물이라도 잡힌 것처럼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도 어머니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으나, 하지 않아도 될 일로 자식을 곤혹스럽게 했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허리가 굽어 머리가 땅에 닿을 듯한 K 어머니의 모습은 사람 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소포를 부칠 줄 모르는 노모는 1시간이나 걸리는 시누이 집에 가서 부친다고 한다. 고추장과 된장, 대가리와 똥을 뺀 멸치, 등등… 바리바리 싸들고 덜컹거리는 시골 완행버스를 탄, 등이 굽은 그 노모에게서 연민과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시골의 궁핍한 사정과 정서를 잘 아는 내가 선박으로 오는 동안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고 그 집을 나왔다. “구더기가 든 된장이라도 보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미치자,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몹시 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는 타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대하고 이해심이 많으면서 정작 내 어머니에 대해서는 인색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해 저문 들판에 늙은 누렁이와 황망히 서 있는 내 어머니의 마음 모습은 헤아려 보려 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오던 날 새벽, 화장기 없는 밋밋한 얼굴로 황급히 달려오셔서, “이것이라도 가져가거라.” 손이 부끄럽다며 오십만 원을 내미는 엄마가 미웠다.
먼 길 떠나는 자식에게 한 푼 보태주지도 않으면서 차비까지 축내며 김포공항까지 따라나서는 시어머니가 미웠다. 연신 한복 앞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세 살짜리 손자를 붙들고 “편지 하거래이, 꼭 하거래이!” 다짐하는 시어머니를 외면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아이를 빼앗다시피 낚아채고 출구를 빠져나와 뒤돌아보았을 땐, 이미 자동문이 철옹성처럼 굳게 닫혀 버린 뒤였다.
이청준 <눈길>의 말미에 나오는 배경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남의 소유로 넘어간 그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깜깜한 새벽에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고서, 아들과 함께 걸어왔던 눈길을 따라 되돌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날아오는 것 같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아그가 뛰어나올 것’만 같은, 굽이굽이 외진 산길에 오목오목 디뎌 놓은 그 아그 발자국 따라 밟으며,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간절히 바라며 눈물 떨구는, 그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던가.
어쩌자고 머리가 허옇게 세어서야 이제 깨닫는가.
말간 아침 햇살이 부끄러워서 선뜻 동네로 들어서지 못하고, 뒷산 잿등에서 시린 눈을 가라앉히는 그 어머니 앞에 바짝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싶었다.
내일이면, 고추잠자리 뱅뱅 하늘을 날고, 붉은 고추 한마당 널려 있던 내 고향 옛집에도 추석명절이 성큼 들어설 것이다.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소원을 빌었듯이, 진심으로 어머니께 용서를 빌어야겠다.
청산하지 못한 오래된 빚처럼 켜켜이 쌓인 묵은 감정들을 털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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