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장대비가 내렸다. 비어 있던 아버지 아파트의 베란다에는 관음죽과 산세베리아가, 치자나무와 항아리에 심어 놓은 석류나무가 푸름을 잃지 않은 채 더러더러 꽃을 맺어 놓고 있었다. 어깨죽지에 힘을 잃은 우리 형제들처럼 그들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애달픈 식구들이었다 생각하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얀 치자꽃잎 한 장도 가엾게만 여겨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사시던 아파트를 정리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아버지가 남긴 짐을 정리하고 혼자 되신 어머니의 거처를 옮겨야 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산다는 건 남의 일로만 여겨지던 일들이 내게도 차례로 일어나는 걸 깨닫는 과정 같았다. 거짓말처럼 어머니가 쓰러지고 또 거짓말처럼 성성하던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우리들의 곁을 떠나셨다.
고단했던 한 생을 대변하듯이 거실로 끌어내어지는 살림살이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슬프고도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가져가기로 하고 혹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물건들은 버리면서, 아버지 아파트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새벽녘에서야 어머니의 장롱 속에 개켜져 있던 묵은 이불들이 끌어내졌다. 방방마다엔 아버지의 금쪽같은 손주들이 잠들었고 남겨진 공간인 거실에 이불들을 붙여 깔고 다섯 형제가 나란히 누웠지만 잠은 쉬이 들지 않고 애꿎은 장대비 소리만 새벽의 유리창을 번갈아 두둑이며 지나갔다.
우리들이 깔고 잠을 청하는, 다홍 깃에 목단꽃이 그려져 있는 초록색 양단 솜이불은 어머니의 혼수품이었다. 다섯 자식을 키우면서 이불이 모자라 처음 두터웠던 솜이불 한 채와 요 한 채를 합쳐 두 채로 나눠 만든, 오십 년이 훨씬 넘는 이불이었다. 이불은 세월의 무게에 눌리고 우기를 품어 이제는 더 이상 부드럽지도 폭신하지도 않았다.
시집오기 전 어머니가 살던 동네 어느 밭에선가 깍지를 까고 초여름의 세상으로 나왔을 목화꽃, 햇빛 아래 구름처럼, 달빛 아래 보석처럼, 하얗게 빛나며 목화꽃은 피어났으리라. 그렇게 스무 날 쯤 목화꽃은 하얗게 피었다가 분홍색으로 변하여 밭고랑으로 뚝뚝 떨어졌으리라.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손톱만한 목화다래가 열렸으리라. 한때 아이였던 어머니는, 한때 귀밑머리 수줍은 처녀였던 어머니는 그 달착지근한 다래를 따먹어 보기도 했으리라.
작은 부채처럼, 작은 왕관처럼 목화다래가 벌어지는 가을이 오면 어머니는 옆구리에 대소쿠리를 끼고 목화밭으로 갔을 것이다. 갈바람에 터진 목화송이를 하나씩 따 담으며 하얀 구름이 사라지는 산마루를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양지 바른 봉당 위에 그 목화를 널면서 필경 어머니는 꿈꾸었으리라. 달밤의 목화꽃처럼, 설레이며 붉게 변해가는 그 꽃빛처럼, 수줍은 꿈을 꾸었으리라.
씨를 빼내기 위해 밤마다 시아틀에 목화를 밀어 넣으며, 외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씨를 뺀 그 목화 보따리를 고개가 휘도록 머리에 이고, 외할머니는 시오리 고갯길을 넘어 장에 가셨으리라. 장터 솜틀집에 들러 어여쁜 딸이 덮을 이불이니 어여삐 틀어 달라 부탁하였을 것이다. 풀먹인 하얀 홑청에 공들여 시침질을 하며 투둑, 목단꽃잎 위에 눈물도 몇 방울 떨어트렸으리라.
다홍치마 새색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삼년 육개월을 기약하며 군에 입대하셨다. 낮선 동네, 낮선 지붕, 낮선 석가래 밑에 열아홉 새색시였던 어머니는 그 햇솜이불을 펴고 혼자 잠이 들었다. 식어버린 방고래에 엄동이 지나가는 새벽이면 그 이불 속에 남아 있는 온기만이 어머니가 의지할 기운이었으리라.
희미한 등잔불 밑에 깔려 있던 목단꽃 솜이불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차례로 다섯 형제가 태어났다.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솜이불의 온기가 우리들을 키웠다. 우리들은 따뜻한 그 이불 속에 누워 뒤란에서 굴뚝새가 우는 소리를 들었고, 아침해가 문지방을 넘는 소리를 들었다. 초승달이 사알짝 허리를 젖히며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꿈을 꾸었고, 수꽃을 밀어낸 옥수수밭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옥수숫대처럼 키가 자랐다.
삼십 촉 희미한 알전구가 켜지는 읍내로 이사할 때도 용달차 한구석에 그 솜이불 보따리가 실려 있었다. 짜갈짜갈, 연탄고래 위의 양은솥 물 끓는 소리가 들리던, 읍내의 작은 양옥은 외풍이 세었다. 바람소리가 윙윙거릴 때마다 머리 끝까지 솜이불을 끌어올리던 우리들의 발채에서 딸그락하고 발에 채이기도 하던 밥주발의 추억이 또한 그 솜이불 속에 있었다. 우리들이 섣부른 날개를 달고 각자의 하늘로 날아간 다음에도 오래도록 어머니는 그 솜이불을 덮고 잠드셨을 것이다.
우리들 유년의 얼룩을 안고 초라해져간 목단꽃 솜이불은 부드러운 카시미론 이불이나 밍크담요에 자리를 빼앗기고 장롱 제일 아랫자리로 밀려났다. 어머니는 금가락지나 월급봉투처럼 소중한 것들은 손수건에 돌돌 말아 그 이불 품 사이에 보관하시기도 했다. 어쩌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침구가 모자랄 때라야 한 번씩 방바닥으로 끌어내져 이불 대신 요로 쓰이던 목단꽃 솜이불은 어머니처럼 늙고 초라해져갔다.
짧은 한여름날 밭고랑 사이로 맥없이 떨어져내린 목화꽃은 두번 피는 꽃이었다. 꽃이 진 자리마다 다래가 맺히고, 맺힌 다래마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면 하얀 솜털을 밀어내며 부드러운 솜꽃이 다시 피었다. 서리가 내리면 대궁째 뽑아 토방 밑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도 가을 볕을 먹고 남아 있는 힘을 다해 솜꽃을 꾸역꾸역 마져 내놓은 다음 아궁이 속으로 타들어가던 목화의 일생은 우리네 어머니의 일생을 닮았다. 내어주고 내어주고, 마져 내어주는….
초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다섯 자식의 이름을 채곡채곡 불러들이셨었다. 놋대야에 따스운 물을 담아 손을 씻기고 솜이불 아랫목에 품어 재우셨었다. 제 손 하나 못 씻던 우리들을 그렇게 키우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어머니를 불러 손 씻기고 아랫목에 손 넣어보며 돌보아야 할 차례인데…. 빈 대궁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혼자 남겨두고 나는 낮선 하늘 아래로 다시 돌아와 속절없는 하늘만 올려다본다. 하늘엔 누가 베어 먹다 버린 것 같은 하얀 반달에 살이 오르고 있다.
비 오던 그날, 누구에게도 선택되어지지 않아 아파트 재활용박스로 내몰려진 목단꽃 솜이불 두 채는 어디로 갔을까. 내 어머니를 닮은, 볼품없고 촌스러워진 그 이불은 내 유년의 얼룩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어디로 갔을까.
김용미
수필가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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