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뉴욕의 리녹스 힐 병원 응급환자실은 일요일인데도 유난히 많은 환자들로 붐볐다. 이들 환자 중에서도 이날 아침 앰뷸런스에 급히 실려 온 한 초로(初老)의 여자 환자가 폐에 피가 차, 호흡이 거칠고 고열로 혼수 상태에 빠져 요주의 1급 환자로 의사들의 주목의 대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아침 제출된 이 환자의 각종 시험결과 자료는 의사들의 불길한 예감을 사실로 확인해 주었다. “젠장, 이거 탄저병 아냐!” 한 젊은 의사가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져 가고 있는 이 환자의 병실을 나서면서 이렇게 내뱉었다.
불과 2주 전에 발생한 9/11 사태로 초미의 비상에 걸려 있던 연방수사국(FBI) 요원들과 뉴욕 경찰 수사관들은 월남계 여인 캐시 웬(61)의 아파트와 직장을 찾아 그녀의 행적과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탄저균의 실마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이들에게 불길한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아니, 미스 웬이 아랍인들의 대미 생화학 테러리즘의 첫 희생자가 아닐까?)
9/11 사건은 공화당의 집권 이후 중국의 발칸화(분열) 획책에 따른 대만 지원 강화, 전임 대통령 빌 클린턴 대통령이 노력으로 성사시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를 위한 제네바 회담의 무산 책동, 폭풍작전 이후 중단된 이라크 공습 재개, 대 러시아 외교 도전, 대북한 강경책 선회 등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의 대외정책, 대기업 우선정책에 따른 서민 경제의 악화 등 국내외 정치의 실패에 따른 신(新) 극우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인기가 급강하하고 있는 와중에 터졌다.
대통령의 정치고문 카알 로브는 즉시 정책입안 보좌관들과 이 ‘절호의 기회’를 공화당에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한 장기대책 입안에 착수했다.
결론은 제2의 십자군 전쟁 감행이었다. 대의명분으로 대미 테러 예방전이라는 구실을 내세웠으나, 카알 로브는 침몰하던 부시 함정(艦艇)의 구원투수로서 9/11사태로 높아진 미국인들의 안보 위기의식을 더욱 고취시켜 공화당의 장기집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계 3차 대전도 불사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민주주의 미국의 수호신(守護神) 펜타곤과 외교를 통한 세계의 평화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국무부가 카알 로브 ‘장기’의 포(捕)와 졸(卒)로 전락했고, 부시의 백악관은 사담 후세인을 알카에다 대미공격의 협력자로 조작, 미국인과 세계인들을 오도하여 이라크를 침략하고 무고한 인민들을 대량 살상하는 범죄조직으로 타락했다.
만일 동물들이 아랍 국가들의 인민들처럼 참혹한 도살과 학대를 당하고 있다면 아마 미국인의 대다수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TV를 통해서 미군들의 아랍인 학살을 목격하면서 마치 야구 중계를 ‘관전’하듯 무사안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9/11 사태로 작은 돌발사태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언론의 보도로 아랍계의 생화학 공격의 개시로 오해되어, 공포의 격랑을 일파만파 일으켰던 캐시 웬 사건의 미스터리는 ‘탄저균 테러’ 사건의 주범이 미국의 생화학 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세균무기 전문가 브루스 이빈스(Bruce Ivins)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나의 코미디로 끝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그는 연방수사국이 정식 기소하기 직전 자살했다.
“우리는 미국의 자위(自衛)를 위해 대량학살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이라크를 선제공격해야 한다”며 미국인들은 물론 전세계인들을 오도했던 “죽음의 상인” 미국 군수산업 복합체의 충견 네오콘들, 자유와 민주주의의 표상이던 미국의 21세기 초 정치무대에 중세기적 야만을 연출한 테러리즘의 주역들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 세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고 미국의 침략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 될 것이다.
열강이 포함(砲艦)으로 세계를 제패하던 19세기식 제국주의적 야만은 이성이 지배하는 정의로운 21세기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세계의 양심이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종교를 앞세운 문명충돌 획책은 더욱 그렇다.
통킹 만의 폭격을 피해 평화를 찾아 천신만고 끝에 미국에 정착한 캐시 웬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야만적 대결이 빚은 백색 테러의 희생양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더 이상 이 값비싼 역사의 교훈을 외면해선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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