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풍 건축 양식이 주류가 된 현대 주거 양식에서 병풍은 그 이용 빈도가 요즘 상당히 좁아졌다. 그래도 구세대에 속하는 우리 연배에서는 병풍이라고 하면 짙은 향수와 함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다. 몇 일전 한 시간 운전 거리에 살고 있는 딸집에 가서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오랜 세월 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가슴 속 응어리를 풀게 되어 참으로 홀가분한 기분이다.
각 가정마다 필요에 따라 병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미국으로 이주 하면서도 가지고 오신 분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병풍에 얽힌 사연을 펼쳐보고 싶다.
첫 번째 떠오르는 병풍은 우리나라 고유의 민화 병풍, 민화라고 하면 익살스런 표정의 호랑이의 등장이 정석이지만 우리 집 것은 화조(花鳥)병풍이다. 어릴 때 병풍에 관한 기억이 난다. 10폭 중의 한 폭 속 극락조랄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새의 하얀 목에 인주를 손끝에 묻힌 나는 작품에 낙관(落款) 찍듯 꾹꾹 찍었다. 꼬리까지 길게 뻗어 가면서. 하고나서 겁이 났던지 손끝에 침을 묻혀 문질러댔으니, 결과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 병풍은 오랜 세월 어머님이 간직하고 계셨는데 1970년대 전후로 해서 고가구 수집 바람이 거세게 불자 돈궤로 티 테이블(Tea Table)로, 반다지, 뒤주 등과 함께 민화병풍은 부르는 것이 값이 되었다. 어머님이 집을 비운 사이 바람처럼 들어 온 도둑이 다리가 긴 제사상, 목기(木器)로 된 칠첩 반상기 등을 궤짝 채로 가지고 갔다. 목기 몇 개와 나무 술병은 지금도 가지고 있으나 민화 병풍은 정말 그립다. 다섯 살 정도 때의 나의 손끝 지장이 찍힌 만화병풍...
두 번째 병풍은 아버님이 젊은 묵객(墨客)을 사랑채에 유숙(留宿)시키며 세월아 네월아 하고 얻어 낸 10폭 짜리 명필, 그 뒷면이 더욱 걸작이다. 고대 중국 석학들의 묵화와 한시(漢詩), 그리고 심산유곡의 선유도(仙遊圖)는 사연이 너무 많아 다음으로 미루고.
세 번째가 문제의 병풍이다. 주인공을 찾기 위해 병원에서 진료하는 틈틈이 전형필 선생이 서울 성북동에 세운 간송 미술관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들렀고 인사동에도 가끔 둘러보았지만 허사였다. 그 10폭 짜리 내용을 적어본다.
1월 송신학성(松身鶴性), 2월 암향소영(暗香疎影), 3월 화개천하춘(花開天下春), 4월 파엽녹성림(芭葉錄成林), 5월 화보공려(花寶供麗), 6월 향문십리(香聞十里), 7월 부귀춘색(富貴春色), 8월 풍국쟁염(楓菊爭艶), 9월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10월 사시장춘(四時長春).
이렇게 나열돼 있는 작품의 순서는 약간 뒤바뀐 느낌이 드는 것은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표구상에 맡겨 3개월 후에 찾아 온 병풍은 맡길 때의 말과는 달리 무엇이건 최상으로 한다 해 놓고, 병풍의 뼈대인 골격을 소나무로 했고 지불한 대가와는 너무나 차이가 났으나 싸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병풍은 작품 한 장 한 장에 시작(첫 글자)과 작품의 말미에 낙관이 있는 것을 보면 따로 족자로 만들어도 좋고 병풍으로 만들어도 좋을 위대한 작가의 깊은 마음이 엿보였다.
제작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났는데 비교적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 참으로 다행이다. 하물며 내가 굳이 작가의 명필 명작을 한문으로 쓴 이유는 한문세대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읽으실 것이고 한 때 문교 행정의 시대착오로 타의에 의해 한문의 영역을 넓히지 못한 세대의 젊은 분께서는 이런 저런 기회에 한자를 익혀나가며 고도로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는 우주시대에 있어서 얻을 수 없는, 100년 전의 작품 속의 예술성과 품위로 작가의 인성의 깊이를 터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참 병풍 작가(1858-1908)의 소묘(素描). 1907년 순종 일 년 12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시고 이듬해인 1908년 여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발목부상으로 인하여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그 해 10월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신 구한말 도창의 대장을 지낸 의병장 운강(雲崗) 이강년 선생 이라니 그저 놀랍고 고귀하신 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음이 무한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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