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청암 임인식은 1920년 1월 26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21대까지 이르는 장손이었다. 집안이 중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부유했던 까닭에 일찍부터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 1939년에 일본 제품인 럭키 카메라를 27원에 구입하고, 1940년에는 일본제 세미 미놀타 카메라를 32원에 구입하였으며, 1941년에는 독일제 롤라이 카메라를 130원에 구입하여 사진 활동을 했다. 해방되던 무렵에 라이카 카메라를 장만한 아버지는 이 세상 무엇보다 아끼고 귀중히 여겼다. 당시에는 라이카 카메라 한대 값이 집 한채 값에 달하는 고액이었다.
단순히 고가품인 까닭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진에 쏟은 정성을 표현하자면 ‘푸른바위’보다는 ‘불타는 바위’ 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아버지의 일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건 곧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의 역사와 일치한다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역사와 열정이 행복하게 만난 경우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대의 흐름보다 앞서가는 이의 고통과 외로움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와정든 고향 정주를 떠나 서울로 내려왔다. 그리고 용산 삼각지에서 한미사진기점을 운영하면서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해서 1949년 1월 14일에 졸업하였다. 원래 성품도 성품이지만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절도있는 예의와 행동을 일생동안 강조하신 삶은 육사 생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즈음 아버님은 일생의 큰 분기점이될 만한 일들을 사진으로 많이 남겨 놓았다. 해방과 더불어 용산역에서 일본인들이 철수하는 장면과 일본인들이 을지로에서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모습 그리고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행사, 어수선한 사회의 혼란과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로 국장을 치르는 장례사진들을 촬영했는데, 1948년의 여순사건 이후 이 나라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끼친 참혹한 전쟁은 바로 6.25 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인 6월 24일 토요일 오후, 퇴근한 아버지는 정훈국 친구분들과 한강으로 야유회를 나가 시간가는줄 모르고 늦게까지 정담을 나누며 지내던 중, 다음날 6월 25일 새벽, 연락병의 비상소집 통보를 받고 사무실로 나가 곧바로 지프에 타고 국방부 출입기자 12명과 함께 전선으로향한것이 전쟁과 뗄래야 뗄수없는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때가 6월25일 12시경이었는데 북한군들은 이미 38선을 넘어 문산까지 내려 온 상태였다. 아버지는 국방부의 사진대장(당시 육군 대위)으로 일하면서 총 대신 카메라로 최전선의 모습들을 남기기 위해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6월 28일 새벽 1시반 경, 아버지는 태어난지 두달도 안된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을 남겨두고 서울을 떠나야만했다. 아버지는 오직 라이카 카메라와 망원 렌즈등의 사진기재를 챙겨가지고 한강을 건너 후퇴했다. 아버지의 카메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신 종군기자들이 많이 쓰던 라이카 3F였는데 1945년 구입하여 5년뒤에 다시 전쟁사진을 기록하게 될줄이야.
밀리고 밀리던 국군이 대전에 있을때의 일이었다. 7월6일, 아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북한군 T-34탱크를 찍기위해 충청남도 전의와 전동 사이의 적진으로 들어가 전투상황을 촬영하던 중 총살된 미군의 모습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바로 AP통신을 타고 전 세계에 알려져 한국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역사적인 사진이 되었다. 동북아시아 한 귀퉁이에서 작은 내분이 일어난 정도로 알던 세계인들은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보고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 미군 병사가 잔혹하게 학살된 사진이 미국의 주요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로 실려 세계인들의 분노를 샀다. 당시 그 사진을 보고, 내 자식인것 같다고 확인을 요청하는 미국 어머니의 편지도 몇 통 날아왔다고 한다.
불타버린 중앙청,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들 중에 오늘날 우리가 책이나 전시회에서 보는 6.25와 관련된 대부분의 사진자료는 나의 아버지가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 유수한 세계 언론들은 물론 자체적으로 종군기자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사진을 많이 받아갔다. 역사를 증거하기위해 사진을 남겨야 된다는 아버지의사명감은 전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돌보는 일조차 하찮게 여길 정도였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아들 랜돌프 처칠과 함께 종군하던 8월24일 낙동강 왜관 부근 다부동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사진을 찍다가 그만 적진까지 들어가 북한군의 총탄에 맞고 만 것이었다. 당시의 부상당한 사진이 여러장 있는걸 보면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최전선에서 군인들과 총 대신 카메라를 메고 전쟁의 현장을 함께했다는 점이나 인천상륙작전을 찍은 걸 보면, 아버지를 종군사진가 가운데 신화적 인물인 로버트 카파와 견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기를 쓰는 것은 아버지의 중요한 일과중의 하나였다. 그것도 시간대별로 메모하는 습관은 나에게 많은 기억을 남겨주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몸이 불편하여 글을 쓰지 못하게 되자 내게 대신 일기를 적으라고 하시며 아버지는 나에게 기록과 메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1998년 4월4일 타계하셨다. 그간 아버지가 남긴 귀중한 기록일기와 사진들은 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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