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 퇴근해 돌아오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의 방에 금붕어 어항이 하나 놓여 있다. 학교 카니발에서 얻은 금붕어 다섯 마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어항까지 사들고 왔다는 것이다. 한 뼘 물 속을 무한왕복하고 있는 금붕어들의 부드러운 몸짓은 한없이 한가로워 보였다. 금붕어를 키우기엔 너무 커버린 녀석이지만 그 뻐끔대는 작은 생명들을 통해, 아니 결국은 텅 비어버릴 어항을 통해 녀석이 배울 뭔가가 기대되어져 나는 자꾸 그 방을 들락거렸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아이의 방에 일찌감치 불이 켜져 있다. 지난 밤 사이에 한 마리가 죽었단다. 변덕스런 봄밤에 급강하한 물의 온도 때문일 거라며 하얗게 배를 보이고 있는 금붕어를 변기로 옮겨놓더니 내게 뒷처리를 부탁한다. 차마 깜깜한 물 속으로 내려보내는 일까진 못하겠다는 뜻이다. 겨우 하룻밤인데, 온라인에서는 무지막지한 상대들과 죽고 죽이기의 게임을 잘도 하더니만 쬐그만 금붕어 한 마리의 죽음 앞에서 돌아서는 녀석의 뒷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법 쓸쓸했다.
예상했던 대로 어항은 두어 주만에 텅 비어 버렸다. 녀석은 작고 약해 보이는 무녀리 금붕어를 격리시키며 먹이를 따로 주기도 했고 반대로 무녀리의 먹이에 달라들어 계속 먹어대는 금붕어의 볼록한 배가 터질까 염려되어 인터넷을 뒤지기도 하는 기색이었다. 금붕어가 배를 하얗게 뒤집으며 떠오를 때마다 녀석은 작은 돌들을 꺼내어 다시 씻어 주거나 생수까지 부어주며 관심을 기울였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황금빛 작은 지느러미를 부드럽게 흔들고 다니던 기억만을 남긴 채 녀석과의 짧은 인연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우리들의 어린 날은 크고 작은 온기를 지닌 생명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들은 그 생명들과의 따뜻한 접촉을 통해, 혹은 아쉬운 이별을 통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당가에 꺾어다 심던 진달래 꽃가지에서부터 시작한 생명에의 관심은 하룻밤이면 날개를 접을 잠자리나 파들대는 풍뎅이, 검정 고무신 속의 소금쟁이나 붕어 두 마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봄날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 앞에서 팔던 노란 병아리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 아래 펼쳐 놓은 그 간질간질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몽클하고, 따스한 병아리의 체온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유혹이었다. 손으로 쥐면 없어져버릴 것 같은 부드러움 속으로 전해지던 생명의 경이감, 하지만 병아리에 대한 기억의 끝은 늘 안타까움뿐이었다. 아무리 애틋하게 돌보아 주어도 가뭇없이 눈을 감아버리던 병아리에 대한 슬픈 기억이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번번이 백원짜리 병아리들을 사들고 왔다.
병아리의 울음소리는 어찌 그리 가냘프던지. 삐악삐악, 내가 기억하는 세상의 모든 소리 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들리는 것이 그 병아리 소리였던 것 같다. 그 소리는 교실까지도 쫓아오고 잠 속에서도 정수리를 콕콕 쪼아댔다. 선잠 깨진 아침에 병아리 상자에 달려가서 확인하던 병아리의 노란 죽음은 또 얼마나 절망적이었던지, 어린 가슴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곤 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옆에 남아 있던 한 마리마져 까맣게 빛나던 눈동자에 눈꺼풀을 자꾸 내리며 까무룩하게 졸고 있는 게 발견될 때의 그 낭패감이라니. 안절부절, 병아리의 남은 의식을 깨워보려 노력했지만 아무리 간절하게 흔들어 보아도 병아리는 그 몽클하게 잡혀오던 감각과 따스했던 체온의 기억만을 손끝에 남겨두고 우리들의 곁을 떠나곤 했다.
우리들은 그 병아리의 죽음을 꽃밭 한 모퉁이쯤에 묻어 주며 슬퍼했다. 하지만 어린 우리들은 병아리를 묻은 그 자리 위로 빨간 칸나가 꽃잎을 채 열기도 전에 병아리를 키웠던 기억마져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해마다의 봄날 삐악삐악, 귓전에 개나리 꽃잎 같은 울음소리를 남기고 떠난 병아리들과의 그 작은 이별 앞에서 우리들 정신의 키는 조금씩 자라고 있었으리라.
따스한 체온의 기억 중에 여남은 살만 되면 등짝에 업고 다니던 어린 동생의 체온만한 게 또 어디 있을까. 바쁜 어른들을 논으로 밭으로 빼앗기고 나면 엉덩방아를 찧어대며 울어대는 간난동생들에게 우리들은 작은 등판을 내어 주어야 했다. 그래서 남은 하루가 이울 때까지, 작은 체온이 잠들 때까지 우리들의 등짝에는 어린 동생들이 매달려 있었다.
우리들은 등에 동생을 업고도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 같은 놀이를 했다. 언니가 팔짝팔짝 고무줄 위를 뛸 때마다 한 박자씩 느린 엇박자로 흔들리며 콧방아를 찧던 동생의 머리통, 생각하면 재미있고 또 정겨운 풍경이었다.
등짝을 코범벅으로 만들어 놓기도 하고 뜨끈한 오줌세례를 퍼붇기도 하던 동생이 잠이 들면 포대기째 살살 내려놓으며 자유를 예감해 보지만 아뿔싸, 자유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으왕하고 잠을 깨버린 동생을 다시 들춰업던 기억, 하지만 성공적으로 동생이 떨어져 나간 다음에는 웬지 모를 허전함이 등짝을 떠나지 않았다. 고물거리며 따스했던 동생의 체온이 아련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듯 우리가 짐이라고 느끼던 것들의 의미는 혹 살아내야 하는 날들에 동행하던 따스함이었는지도 모른다. 등에 붙어 있던 어린 동생의 따스한 체온을 기억하면 추억이 곱절로 행복해지듯이 오늘 우리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깨의 무거운 짐은 언젠가는 풀어보게 될 행복한 기억의 보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금살금 놀러 나가는 우리들의 뒤꿈치를 갸웃갸웃, 고갯짓하며 쫓아오던 닭들을 향해 발을 굴러 으름장을 놓고, 뛰어놀다 돌아오던 저녁길의 석양 밑에서 토끼장 속의 하얀 토끼를 잊지 않고 푸른 토끼풀을 한웅큼 뜯어오며 우리들은 작은 생명들을 돌보고 거두는 법을 자연스레 배웠다. 누렁이가 살던 마루 밑의 빈 자리나 학교 갔다 돌아와 마주친 빈 외양간, 여물구새 뒤집혀 있는 빈 돼지우리가 주던 예기치 않았던 슬픔은 컸다.
어느 시인인가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 했던가. 생각하면 어린 우리들을 키운 건 따스한 체온을 가지고 있던 그 생명들, 혹은 그 따스했던 생명들과의 이별이 아니었을까.
김용미
수필가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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