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 4월 런던에는 봄비가 물감처럼 내리며 거리와 공원의 수목들을 파랗게 채색하고 있었다. 지난겨울이 유달리 혹한이어서 벚꽃들이 더욱 마음껏 서로 몸들을 비비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런던은 온통 6일 실시된 총선 열기에 들떠 있었는데 고든 브라운 현 수상의 노동당이 보수 및 진보당에 밀리고 있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 마지막 편인 제7편 ‘해리 포터와 데슬리 할로우즈’의 세트 방문차 런던엘 다녀왔다. 런던서 1시간가량 떨어진 리브스덴 스튜디오에서 촬영 현장을 구경하고 데이빗 예이츠를 비롯해 해리의 친구 역을 맡은 루퍼트 그린트 등 배우들을 인터뷰 했지만 영화가 개봉되는 오는 11월까지 엠바고가 걸려 있다.
쓸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제1부(11월19일 개봉)와 제2부(2011년 7월15일 개봉)로 나뉘어 입체영화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과 제1부의 간단한 내용.
일요일인 지난 25일 비둘기 요리를 파는 하이드팍 앞의 숙소 도체스터 호텔을 나와 나의 런던 센티멘털 종착점인 워털루 브리지를 향해 도보산책에 나섰다.
LA의 하일랜드와 바인을 연상케 하는 피카딜리 서커스를 거쳐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코벤트 가든부터 찾아갔다. 오페라 하우스는 LA의 파머스 마켓을 닮은 노천시장 옆에 있었는데 건물은 볼품없었다.
중국계임이 분명한 소년 모습의 순찰경찰에게 길을 물어 앤소니 합킨스가 나온 영화로 잘 알려진 채링 크로스 로드를 거쳐 워털루 브리지에 도착하니 강변을 따라 런던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전 세계에서 온 선수들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템스 강을 바라보고 LA 필을 떠난 에사-페카 살로넨이 상임지휘자로 있는 런던 필하모니아의 콘서트홀인 로열 페스티벌홀이 있는데 이 건물도 살풍경이다. 이에 비하면 LA의 디즈니 콘서트홀은 천상의 것이다.
강가에 있던 일식당 오주를 찾아 갔더니 언제부터인지 중국식당 젠으로 바뀌어 식사를 포기하고 거금 15파운드를 내고 옆에 있는 런던 필름 뮤지엄엘 들어갔다. 뮤지엄 내 회의장에서 하루 종일 스파이와 공상과학 영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문레이커’ 등 007시리즈 세편을 연출한 루이스 길버트 감독을 만났다. 연로해 무척 쇠약해 보였다.
이어 ‘문레이커’에서 본드의 적수인 쇠이빨을 한 ‘조스’로 나온 리처드 킬과 그의 나이 어린 애인으로 나온 블랜치 라발렉과 팬들과의 대화가 있었다. 거구의 킬은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굵은 음성으로 유머를 섞어가며 본드 시리즈의 경험을 들려 줬다.
뮤지엄을 나와 강변에서 생맥주를 한 잔 마신 뒤 공복에 취기가 오른 김에 영화 ‘애수’에서 비비안 리가 로버트 테일러를 기다리던 워털루 스테이션을 오래간만에 다시 찾아갔다. 아름답고 슬픈 고전명화가 남긴 여운이 역 내에 가득했다.
호텔로 돌아오는데 길가의 퍼브마다 술꾼들로 바글바글 댄다. 런던너들은 만원 퍼브를 피해 보도로 밀려 나와 맥주들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마시고 있다. 미국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인데 런던의 ‘바비’들은 술꾼들을 모른 척 했다.
런던은 대로에서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면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어 나 같은 여객이 길 잃어버리기 안성맞춤이다. 복작대는 대로와 달리 골목들은 으스스할 정도로 조용한데 ‘잭 더 리퍼’가 이런 환경을 이용해 연쇄살인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런던을 걸으면서 도시가 아늑하다고 느꼈다. 걷는 사람을 받아들이며 안아주듯 해 산책이 어울리는 도시다. 조 스태포드가 부른 ‘온 런던 브리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긴 산책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해리 포터’ 세트를 방문한 이튿날은 13세기에 지은 솔즈베리 대성당을 방문했다. 고풍이 돌들의 속살까지 스며든 고딕건물은 보수 중이었는데 물론 처음에는 가톨릭 성당이었지만 영국이 바티칸과 절연한 뒤로 영국 국교 교회로 쓰이고 있다. 사랑 때문에 바티칸과 절연한 장본인인 헨리 8세가 성당 내 금붙이를 몽땅 몰수해 사제 금고를 채웠다고 안내자가 알려 줬다.
좁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헉헉대며 성당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 안내자로부터 ‘정상에 오르다’라고 적힌 배지를 받아 옷깃에 꽂았다. 성당 구경은 이 성당 건축에 관한 내력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켄 폴렛과 함께 했다. 이 소설은 지금 프리미엄 케이블 TV 스타즈에 의해 미니 시리즈로 제작중이다.
성당 내 있는 세계 민주주의의 출생증명서인 마그나 카르타의 진본을 구경한 뒤 성당을 떠나 영국의 고인돌 스톤헨지를 찾아갔다. 이튿날 다음 행선지인 베를린을 향해 런던과 작별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