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쑥한 차림의 로버트 왜그너(사진)를 보자마자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나는 당신 영화와 함께 자랐다”고 말하자 그는 “굿”하며 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렸을 때 본 그의 영화 ‘프린스 밸리언트’와 ‘부러진 창’ 그리고 ‘천국과 지옥 사이’와 ‘헌터스’ 등의 장면이 눈앞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꼬마 때 재미있게 보면서 동경했던 스크린의 영웅을 반세기만에 직접 만나니 감개가 무량했다. 왜그너는 나이 80답지 않게 정정하고 쾌활했는데 비록 잿빛머리에 얼굴에 주름은 갔지만 여전히 멋쟁이 미남이었다.
왜그너를 만난 것은 지난달 10일 있은 그가 출연하는 CBS-TV의 인기 수사물 시리즈 ‘NCIS’를 위한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할리웃 황금기의 청춘스타 나탈리 우드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왜그너는 사실 연기보다 잘 생긴 얼굴과 잘 익은 음성 때문에 팬들의 사랑을 받은 배우다. 그는 1950~60년대에 다작에 나왔지만 이렇다할만 한 명화가 없는데 70년대 들어 TV로 방향을 틀어 나온 수사물 ‘스위치’와 ‘하트 투 하트’가 빅히트를 하면서 영화에서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까지 60년간 연기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청년기였던 할리웃 스튜디오 시대 선배들인 스펜서 트레이시와 랜돌프 스캇 같은 사람들의 격려와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는 왜그너는 “나는 늘 배우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은퇴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부러진 창’과 ‘산’ 등에서 왜그너와 공연한 트레이시는 왜그너의 충실한 후원자여서 왜그너는 회견 중 그의 이름을 여러 차례 거론하며 고마워하고 그리워했다.
왜그너는 1950년대 폭스에 전속돼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중 대표작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서부영화로 만든 ‘부러진 창’. 왜그너는 이 영화의 감독 에드워드 드미트릭과 일한 경험이 즐거웠고 또 큰 도움이 됐다면서 그 당시 스튜디오는 자기 같은 무명 배우를 골라 스타로 키우는 양성소였다고 회상했다.
왜그너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 유지법으로 요가와 걷기와 일을 들면서 저녁에는 와인과 위스키도 즐긴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이어 “세 딸과 한 아들 그리고 손자 등 젊은 사람들을 주위에 가진 것도 젊음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우드와 두 번 결혼한 왜그너는 “지금도 나는 우드를 그리워한다”면서 “우드가 죽었을 때 가족이 똘똘 뭉쳐 슬픔을 견뎌냈다”고 토로했다. 지난 1981년 우드가 카탈리나 해안에서 익사했을 때 그 죽음을 둘러싸고 타살이라는 설까지 나와 왜그너는 수년간 팬들 앞에서 사라졌었다.
그런데 최근 우드의 여동생이 언니의 죽음을 재조사해 달라고 LA카운티에 요구, 뉴스가 되고 있다. 왜그너는 이에 대해 “만약 카운티에서 그것을 재조사할 용의가 있었다면 벌써 했을 것”이라면서 처제의 요구를 일축했다.
“한 가족과 같았던 과거 스튜디오에 비하면 요즘 할리웃은 너무나 기계화하고 비인간적”이라는 왜그너는 텍스트 메시지 때문에 늘 고개를 숙이고 사는 자녀들에게 “고개를 들어 내 얼굴과 눈을 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할리웃뿐 아니라 관객의 태도도 많이 변했다면서 “옛날 우리는 극장에 들어가면 영화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고 스크린에 매달렸다”면서 “언젠가 뉴욕의 극장엘 들어갔다가 셀폰이 울리고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에 놀랐다”고 혀를 찼다.
왜그너는 최근 자신의 삶을 적은 자서전 ‘내 마음의 조각들’(Pieces of My Heart)을 써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책에는 자기와 ‘타이태닉’(1953)에서 공연한 23세 연상의 바바라 스탠윅과의 4년간에 걸친 로맨스를 비롯해 자기 일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며 일독을 권했다.
12세 때 LA의 부촌 벨에어의 골프장에서 클라크 게이블과 케리 그랜트와 프레드 애스테어의 캐디를 한 것이 계기가 돼 할리웃에 진출했다고 알려준 왜그너는 “그들은 나의 스승이자 친구로 나를 도와줬다”면서 꿈만 같다고 추억했다. MGM에서 엑스트라로 일해 받은 첫 봉급은 55달러.
왜그너는 오랜 친구로 역시 배우인 질 세인트 존(007 시리즈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과 20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요즘도 쉬지 않고 영화와 TV에 나오고 있다. 왜그너는 인터뷰 후 자리를 떠나면서 “굿바이 에브리바디.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진짜 젠틀맨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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