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린 쇼팽의 출생 200주년의 해다. 쇼팽의 피아노곡은 2개의 협주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모두 녹턴과 에튀드와 발라드 그리고 폴로네이즈와 마주르카와 월츠 및 프렐루드 등 솔로 들이다. ‘나의 우주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이라며 바흐와 베토벤이 되기를 마다했던 쇼팽은 미니어처리스트였다.
뼛속까지 낭만파였던 쇼팽에게 있어 인간의 감정을 가장 다채롭고 시적이요 또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는 여성과도 같았던 자신의 내면과 음악성을 토로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였을 것이다.
쇼팽의 멜로디는 단순명료하고 음은 빛을 발하며 울리는데다가 곡들이 모두 절묘하게 서정적이어서 그의 음악을 들을 때면 낭만파 시인의 시를 읽을 때처럼 아득한 황홀감에 빠져들게 된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생 때 특히 쇼팽의 에튀드 제3번과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을 좋아해 종로에 있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 들를 때면 자주 이 곡들을 신청해 듣곤 했었다.
에튀드 제3번은 쇼팽 자신도 그 때까지 자기가 작곡한 음악 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을 정도로 곱고 비감하다. 이 곡은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떠나면서 자기 첫 사랑인 가수 콘스탄치아 글라드코브스카에게 바쳤다는 일화가 있어 ‘이별의 노래’라고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이 곡은 가사가 붙여져 애창됐는데 나도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하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이 곡은 미국에서도 팝 여가수 조 스태포드가 ‘노 아더 러브’라는 노래로 불러 빅히트 했다.
멜로디가 아름다운 쇼팽의 또 다른 곡인 ‘영웅 폴로네이즈’도 페리 코모에 의해 ‘틸 디 엔드 오브 타임’이라는 노래로 불려 역시 빅히트 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은 일명 ‘장송곡’이라 불리는 제3악장으로 잘 알려진 것으로 난 언젠가 신년벽두에 르네상스에 들러 이 곡을 신청했다가 D.J.로부터 “신년 초에 틀기에는 좀 곤란하다”며 거절당했던 적이 있다.
쇼팽의 곡 중 아마도 가장 대중적인 것이 ‘즉흥 환상곡’과 활짝 펼쳐지고 화려하며 또 장엄하기까지 한(그래서 쇼팽 음악 같지 않다는 느낌마저 든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 온 뒤로 적지 아니 음악회엘 갔지만 아직껏 단 한 번도 이 협주곡을 실연주로 듣지 못했다.
지난 27일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제1번 대신 들은 곡이 제2번 피아노 협주곡이다. 제1번보다 먼저 작곡된 이 협주곡은 제1번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쇼팽의 초기 피아노 음악의 독창성과 테크닉 그리고 기존 음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인 면을 드러낸 곡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이 곡은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제2악장이 아름답다. 쇼팽은 이 악장의 영감을 콘스탄치아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얻었다는 말이 있다.
이 날 피아노는 올 시즌 LA필 레지던트 피아니스트인 원로 에마뉴엘 액스가 이제 불과 나이 24세밖에 안 된 LA필 부지휘자 라이오넬 브린귀에르의 바톤 하에 연주했다.
액스는 피아노를 끌어안고 애무하듯 스무스하고 물 흐르듯 연주했는데 분명한 음과 물방울이 튀는 듯한 울림을 만들어내면서 아름답고 깊이 있는 연주를 했다. 오케스트라가 독주자에게 양보를 하면서 조화를 이룬 연주였는데 특히 제2악장은 격정적이요 비감하고 또 서정적이어서 한 편의 시와 사랑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협주곡 전에 연주된 베를리오즈의 ‘해적’ 서곡은 마치 옛날 해적영화에서 에롤 플린이 칼부림을 하듯 힘차고 경쾌하고 박력 있었다. 브린귀에르는 마치 음의 화가처럼 음색과 멜로디를 총천연색으로 그려냈다.
휴게시간 후 연주된 쇼스타코비치의 제6번 교향곡은 이색적으로 제1악장이 느리고 제2와 3악장이 빠르게 연주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어딘가 한 구석에 장난기와 냉소성을 갖췄는데 이는 어쩌면 스탈린 정권 하에서 반동으로 몰려 호되게 혼이 난 그가 음을 통해 정권을 비웃는 제스처일지도 모른다.
소년처럼 보이는 브린귀에르의 지휘는 마치 살로넨의 그 것처럼 사뿐하고 아름다웠는데 거기에 역동적인 박력감이 더 했다. 교향곡의 제2와 3악장은 나무랄 데 없이 정열적이요 섬세하고 또 힘 있고 아름다웠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루빈스타인, 클라이번, 액스 등 저명한 피아니스트들이 모두 쳤지만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러시아의 곱슬머리 신동 예프게니 키신이 지난 1984년 12세 때 모스크바 필과 동시에 제1번과 2번을 연주한 것을 생으로 담은 RCA 빅터판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음반의 제2번을 두 번 들으며 준비했다.
흰 장갑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쇼팽의 삶을 다룬 영화로는 ‘잊지 못할 노래’(A Song to Remember-코넬 와일드 주연)와 ‘즉흥곡’(Impromptu-휴 그랜트 주연) 등이 있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