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설국엘 다녀왔다. 선댄스 영화제가 열린 유타주 팍시티는 백설이 만건곤했다. 미국에 온지 30년 만에 하는 눈 구경이어서 추위마저 상쾌했다. 진짜 산소호흡을 했다. 6일간 머무는 동안 거의 쉬지 않고 큰 눈, 작은 눈, 진눈깨비에 우박까지 내렸는데 동네는 온통 영화제 참가자들과 스키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낮 추위는 견딜 만했는데 밤 추위는 매서웠다. 밤에 멀리서 형광조명을 받으며 길게 미끄러져 내린 하얀 스키 비탈이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인 듯했다.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로 방글라데시 태생인 사진기자 무나와르 호세인과 함께 유숙한 콘도가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멀지 않아 자주 걸어 다녔는데 현지 마켓에서 산 털모자를 쓰고 눈길을 걷자니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무나와르와 동네 마켓에 가서 식료품을 사는데 뉴욕타임스의 마놀라 다기스와 전 워너 인디펜던트 픽처스의 홍보담당 부사장 로라 김도 장을 본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아침은 무나와르가 해 주는 오믈렛으로 때우고 하루 종일 영화만 봤다. 모두 18편 정도를 봤다. 선댄스는 토론토와 비슷했다. 한 극장 안에 있는 이 스크린 저 스크린을 들락날락 하다보면 하루가 다 갔다. 추위 속에서도 긴 열을 이루며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들의 모습도 마찬가지.
로버트 레드포드가 만든 선댄스(그가 나온 웨스턴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에서 따온 이름) 영화제는 세계 최대의 인디영화제다. 그런데 영화제가 해가 거듭할수록 인기가 높아지면서 근래 들어 점점 본래 취지와 달리 파티와 고급 선물이 판을 치는 할리웃식 영화제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주최 측은 올해부터 존 쿠퍼를 신임 총감독에 임명하고 본래 설립 목적인 영화 예술에 치중하는 영화제로서 분위기 일신을 시도하고 있다.
선댄스는 원래 기록영화가 강한데 올해는 이 경향이 더 강했다. 나도 기록영화를 6편 봤다.
그 중에서 북한의 독재와 폐쇄성을 폭로하기 위해 문화교류의 명목 하에 2명의 한국계 덴마크인 코미디언 청년(한 명은 경련성 마비증자)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갔다 나온 덴마크인 저널리스트 마즈 브뤼거의 ‘붉은 교회’가 인상적이었다. 브뤼거는 게릴라식 영화 제작법으로 북한 당국을 교묘히 속이고 북한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체제의 폐쇄성을 조롱하고 비판했는데 분단 조국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보기에 언짢고 가슴이 아팠다. 영화를 함께 본 로라도 께름칙한 표정이었다.
이 밖에 콜롬비아의 마약 왕으로 피살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아들과의 인터뷰 ‘내 아버지의 죄’와 캄보디아의 양민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폴 포트의 오른팔이었던 ‘브라더 넘버 투’와의 인터뷰 ‘인민의 적’과 재키 케네디를 수십 년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미 파파라치의 원조 론 갈렐라(77)에 관한 ‘그의 카메라를 때려 부숴’ 등이 좋았다.
한국 영화로는 임우성 감독의 ‘채식주의자’(사진) 단 1편이 출품됐다. 갑자기 고기와 생선을 먹기를 거부하면서 고기냄새가 난다고 남편과의 관계마저 거부하는 젊은 여자(채민서)와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이 여자에게서 강한 창작과 성욕을 느끼는 여자의 형부(김현성)와의 관계를 그린 드라마다. 형부가 여자의 나신에 화려한 색깔의 꽃을 그리면서 예술과 육체와 섹스가 결합되는데 매우 에로틱하면서도 심미적 예술 감각을 지닌 영화다.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틸다 스윈튼이 나오는 이탈리아 영화 ‘나는 사랑이다’였다. 지난해 토론토 영화제서 격찬을 받았는데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밀라노의 거부 방직공장 사장의 아내의 금지된 정열과 부와 권력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그렸는데 스윈튼의 연기와 촬영과 음악 등이 모두 뛰어나다. 올해 미국서 개봉된다.
이 밖에도 터프한 호주 갱스터 일가족의 범죄 드라마 ‘동물의 왕국’과 외로운 중년 남녀의 얄궂은 사랑의 얘기 ‘사이러스’, 비트세대 시인 앨런 긴스버그의 전기물인 ‘하울’과 젊은 보수 유대교 신자들의 마약밀수 실화를 다룬 ‘홀리 롤러스’ 그리고 딸과 같은 창녀를 재생시키려고 애쓰는 중년 남자의 드라마 ‘라일리 집이 환영합니다’ 및 인기 록가수 조운 젯의 초기를 다룬 ‘러너웨이스’ 등이 볼만했다.
그러나 내가 이번 선댄스에서 가장 강한 감동을 받았던 사실은 시카고의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를 목격한 것이다. 목에 낀 파이프로 호흡하는 그는 말은 못하나 여전히 글은 쓴다. 몇년 전 토론토에서 봤을 때보다 더 쇠약해진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의 영화에 대한 정열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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