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맨해턴의 야경은 비수의 감촉처럼 매섭고 찌르는 듯 아름다웠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은 딱히 차가운 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어둡고 육중한 밤하늘 아래 구구각색으로 말들을 토해내면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지상의 전등꽃들은 검은 심장에 알알이 박힌 광채 나는 보석들 같았다. 올림퍼스의 제우스가 하계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호사하면서 몹시 아름다운 것은 아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지난 주말 사흘간 영화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Percy Jackson and The Lightning Thief) 프레스 정킷에 참석차 뉴욕에 간 김에 오래간만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엘 올라갔다. 오늘 개봉된 이 영화는 제우스의 번개를 훔친 자로부터 이를 회수하려는 포세이돈의 반신반인 아들 퍼시의 모험을 그린 현대판 신화로 영화의 일부 장면이 이 빌딩 꼭대기에서 일어나 피어스 브로스난 등과의 인터뷰도 빌딩 61층에서 있었다.
민주국가이면서도 제국주의 근성을 못버리는 미국을 나타내기에 알맞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마치 하늘에 도전이라도 하듯 저돌적으로 공중을 뚫고 우뚝 서 있었다. 바벨탑이 생각났다. 그와 함께 빌딩을 지은 사람들의 모험성과 대담성 그리고 진취성에 감탄을 했다.
토요일 저녁을 일찍 먹고 숙소인 센트럴팍 인근 호텔서 핍스 애비뉴와 34가에 있는 빌딩까지 걸어갔다. 30분 정도 걸렸는데 혹한이 아니어서 오히려 겨울바람이 상쾌했다.
내가 이번에 굳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찾아간 것은 사람 울리는 로맨스 영화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1957) 때문이다. 유럽 발 뉴욕 행 여객선에서 만난 선남선녀로 둘 다 따로 약속한 사람이 있는 케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는 항해중 사랑에 빠진다.
배가 뉴욕에 도착하자 둘은 앞으로 반년 후인 7월1일 하오 5시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의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그 때까지도 서로를 못 잊으면 그것이야말로 기억할 만한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마침내 약속의 날 카는 그랜트가 기다리는 빌딩 꼭대기를 쳐다보며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랜트는 카를 자정까지 기다리다 상심한 채 귀가한다.
이 영화는 탐 행스와 멕 라이언이 나온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라이언과 그의 친구인 로지 오다넬이 TV를 통해 보면서 눈물 콧물을 흘려 다시 유명해졌는데 나는 그랜트가 카를 기다리던 바로 그 지점에 서 보고 싶어 이 날 빌딩을 찾아갔다.
옥외 전망대가 있는 곳은 86층으로 입장료가 20달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랜트가 카를 기다렸던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공연히 서성댔다. 빌딩에는 제일 높은 102층에도 실내 전망대가 있는데 나는 15달러를 더 내고 진짜 꼭대기엘 올라갔다. 그랜트가 기다리던 곳이 86층이었는지 아니면 102층이었는지 알쏭달쏭했는데 내 생각에는 86층이었던 같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찍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을 내려오면서 흑인 기사에게 “당신 ‘언 어페어 투 리멤버’ 봤소”라고 물었더니 그는 “영화는 안 봤지만 그 영화를 여기서 안 찍었다는 것만은 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영화의 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허상으로 실제를 체험케 하는 마술이다. ‘애수’와 ‘카사블랑카’는 모두 세트에서 찍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와 모로코의 가짜 술집 ‘카페 아메리캥’을 찾아가고 있다.
영화에서 그랜트와 카가 선내 바에서 마시던 핑크 샴페인처럼 핑크빛 나는 ‘잊지 못할 사랑’은 레오 맥캐리가 감독했는데 원전은 역시 맥캐리가 연출한 흑백 영화 ‘러브 어페어’(Love Affair·1939·사진). 여기서는 프랑스 미남배우 샤를르 봐이에와 아름다운 미국 여우 아이린 던이 나와 사랑에 울고 웃는다. ‘잊지 못할 사랑’이 화사하다면 ‘러브 어페어’는 고상한데 둘 다 모레 밸런타인스 데이에 딱 맞는 영화다.
한편 ‘러브 어페어’는 ‘부정’ ‘알리바이’ ‘프론트페이지’ ‘무기여 잘 있거라’ ‘헨리 8세의 사생활’및 ‘피그말리온’ 등과 함께 DVD 세트 ‘아카데미 컬렉션: 엔벨로프 플리즈 Vol.1’(Academy Collection: The Envelope Please Vol.1) 안에 포함돼 오는 23일에 출시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하면 또 하나 잊지 못할 영화가 ‘킹콩’(1933)이다. 난 이 영화를 중학생 때 단체입장으로 중앙극장에서 봤는데 킹콩이 큰 손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미녀 페이 레이를 마치 장난감처럼 잡고 빌딩 꼭대기 비행선 마스트에 올라가 기총소사를 하는 복엽 비행기들을 박살내던 장면이 흥미진진했었다. 결국 킹콩은 무차별 총격에 견디지 못하고 빌딩 꼭대기에서 땅바닥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미녀가 야수를 잡은 것인데 킹콩의 슬픈 눈동자가 불쌍했었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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